![]() |
||
|
|
[표지이야기] 테러당하는 ‘역사의 숨결’ 밀양 박씨 채색벽화 발굴의 진실과 하남시 백제유적 현장을 통해 본 문화재 보호정책의 허실
하지만 ‘태풍이 찾아낸 고려벽화’란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다. 이 벽화는 태풍 때문에 발견된 게 아닌 것이다. 이 채색벽화가 처음으로 햇빛 아래 드러난 건 이미 10여년 전이었다. 그리고 벽화가 발견된 사연 속에는 도굴꾼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다른 많은 문화재들이 그렇듯이.
태풍이 찾아낸 것이 아니었다
9월27일 찾아간 박익의 무덤은 도굴의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뒷산 산길을 조금 오르자 잡목숲을 헤치고 박익 무덤이 나타났다. 그러나 무덤을 덮고 있는 것은 잔디가 아니었다. 연녹색 천막위에 소나무가지들을 뒤집어쓰고 있는 무덤은 겉모습에서부터 도굴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 직사각형(방형)이었던 무덤은 도굴 때문에 흉하게 일그러져 본디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무덤 오른쪽 앞면에는 도굴로 파헤쳐진 무덤을 뒤늦게 이참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봉분 속에서 나온 흙무더기가 볼썽사납게 쌓여 있었다. 뒤쪽에는 비닐조각들이 흙이 묻은 채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고 무덤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썩어 푸석푸석해진 나무토막들이 도굴이 이미 오래 전에 이뤄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10년쯤 전에 도굴이 한 차례 있었습니다. 당시 무덤 앞 오른쪽에 난 도굴 갱도를 발견하고 무덤 속에 들어가봤죠. 당연히 그때 봉분 속에 석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석실벽에 그림이 있는 것도 봤습니다.” 동행한 밀양 박씨 문중의 총무 박희학(68·박익의 후손)씨가 무덤 오른쪽 흙무더기를 가리키며 대뜸 말했다. 하지만 당시 벽화가 있다는 사실은 박씨 문중 사람 일부에게만 알려졌다. 문중은 곧바로 청도면 파출소에 도굴을 신고했고 경찰이 와서 벽화를 보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도 그 벽화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따져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경찰도 문화재당국에 벽화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고 박씨 문중은 문중대로 조상의 묘가 훼손됐다는 사실이 밖에 알려질까봐 도굴된 곳을 서둘러 봉합해 버렸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도굴이 있었죠. 물론 두 번째 도굴이 있었던 사실은 이번 태풍이 오기 직전에 알게 됐지만…”하며 말끝을 흐리던 박씨가 무덤 뒤쪽으로 가더니 움푹 꺼져 들어간 곳을 가리켰다. 1차 도굴이 이뤄졌던 봉분 앞쪽처럼 뒤쪽 중앙에도 봉분을 뒤덮은 천막이 아래로 쑥 들어가 있었다. 도굴갱도로 내려앉은 부분이 금방 봐도 알 만큼 표나게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몰랐는데 태풍이 오기 전 저 아래에 있는 제실(祭室)관리인이 벌초를 하러 올라왔다가 무덤 봉분 뒤쪽이 내려앉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태풍이 오면서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것이죠.” 도굴범이 도굴 직후 ‘공을 들여’ 감쪽같이 도굴흔적을 감춘 바람에 지금까지 2차 도굴을 몰랐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도굴꾼은 도굴갱도로 쓴 석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나무토막들을 잇대서 받쳐놓은 뒤 빗물이 석실 안으로 새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닐을 덧씌웠고 그 위에 다시 봉분 잔디를 덮은 것으로 드러났다.
3년 전 ‘문화재’로 신청했음에도…
박씨 문중의 의뢰로 9월17일 첫 현장조사를 벌였던 동아대박물관 심봉근 교수는 “2차 도굴이 있었던 도굴갱도에 남겨진 나무토막을 볼 때 2차 도굴도 10년쯤 전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같은 도굴꾼이 먼저 앞쪽을 통해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나중에 다시 와서 2차 도굴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최소한 두 차례 이상 도굴이 있었고 1차 도굴과 2차 도굴은 엇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는 얘기다. 무덤 주변에 나뒹구는 비닐에는 ‘87년 8월17일’이란 날짜가 찍혀 있어 2차 도굴 시점을 추정하게 해줬다. 현장조사를 실시한 동아대박물관 역시 현장에 나갈 때까지만 해도 벽화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동아대박물관 이동주 학예사는 “박씨 문중이 붉은색 그림이 그려진 화문석(畵文石)이 무덤에서 나왔다며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지 조사해 달라고 했다”며 “그래서 갔다가 ‘뜻밖에’ 벽화를 발견하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9월26일 박익 무덤을 국가지정 사적으로 가지정했다. 따라서 취재진이 무덤 속 석실내부에는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현장조사팀에 따르면 벽화는 석실 내부 사면에 모두 그려져 있다. 하지만 언론에 알려진 서쪽과 동쪽 장벽 벽화는 훼손이 별로 안 된 선명한 모습이지만 남쪽과 북쪽 벽화는 도굴꾼들로 인해 상당부분 훼손됐다. 물론 들고 갈 만한 것은 도굴꾼이 이미 다 빼내간 듯 내부 부장품은 단 하나도 남은 게 없다. 도자기나 장도, 요대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석실 내부를 촬영했던 이동주 학예사는 “벽화 중 일부는 아예 날아가버린 것도 있고, 벽화를 도굴꾼들이 떼어가려 했던 흔적도 보인다”며 “도굴꾼이 손이나 어깨로 문지른 듯한 부분도 있어서 벽화 일부를 샘플로 떼내 가져가 상품성을 흥정해봤을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도굴 이후 빗물이 석실에 흘러들어간 탓에 봉분 점토물이 스며들어 그림을 덮은 부분도 있었다. 또 하인이 말을 잡고 있는 모습의 남쪽 벽화는 도굴꾼이 석실 내부로 들어가면서 무너진 흙더미가 뒤덮어 왼쪽 부분이 크게 훼손된 상태다. 현재 석실 안은 봉분 잡초뿌리에서 뚝뚝 떨어져내린 물기로 무척 습한 상태여서 벽화보존에 애를 먹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석실 내부에 물받이통까지 받쳐뒀다. 석실 북쪽 벽에도 그림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도굴꾼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벽이 쓰러져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대박물관쪽은 북쪽에 있던, 쓰러진 벽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어 도굴꾼들이 마구 밟고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박희학씨는 “1차 도굴이 이뤄졌던 무덤 앞쪽에서 망치, 징, 목장갑 등이 발견됐다”며 “석실 입구에 있던 혼유석(魂留石)이 발견됐는데 삽과 곡괭이로 여러 군데 긁혀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무엇을 훔쳤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경남도 문화예술과는 “당시 문화재 신청을 했을 때 박익 선생의 문집은 문화재로 지정했지만, 개인 문중 묘는 문중에서 관리하는 것이 원칙이라서 지정하지 않았다”며 “여러 문중에서 선조 묘를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하는 판국인데 박씨 문중 묘만 지정해주게 되면 문중간에 싸움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문화재지정 신청 당시 동아대박물관쪽도 박익 무덤 속에 벽화가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촌로들이 하는 말인데, 하며 흘려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대박물관 박문국 과장은 “3∼4년 전에 벽화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치마를 입고 머리에 무언가 쓰고 있는 여자도 보이는, 그런 옛날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다”면서 “하지만 찍어둔 사진도 없고 촌로들이 하는 말이고 해서 믿을 수가 없어 그냥 넘어갔다”고 털어놨다. 밀양 박씨쪽이 문중 사람인 박 과장에게 벽화의 존재를 알린 것이었다. 지난 98년과 지난해 2월 문화재 지정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한 현지조사가 박 과장에 의해 두 차례나 이뤄졌지만 “조상의 묘를 파헤칠 수 없다”는 이유로 벽화는 무덤 속에서 여전히 걸어나오지 못했다. 박씨 문중의 도굴피해는 박익 무덤만이 아니다. 근처 창녕군 계성면에 있는 박익의 부친 은산 부원군 박영균 묘도 올 봄에 도굴을 당했다. 박희학씨는 “경남 산청에 있는 박익 선생의 넷째아들 박총의 묘도 도굴 흔적이 드러났다”며 “주변의 고려시대 묘는 전부 도굴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는 풍수지리책에 박익 묘가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이란 대표적인 명당으로 나와 있는데다 박익이 중국에서 금띠를 받았다는 설이 전해내려와 전문 도굴꾼이 이를 노린 것으로 추정했다. 박익의 묘는 매장문화재였지만 도굴은 문화재로 이미 지정된 곳도 가리지 않는다. 지난해 5월 창원시 북면 갈전리 지방문화재인 최윤덕 장군 묘와 그 부인의 묘소가 함께 도굴당했다. 묘지는 각각 봉분 양쪽 옆구리가 가로 1m, 세로 1.5m씩 파헤쳐진 뒤 흙으로 되메운 상태에서 잔디로 덮여 있었다. 최 장군 묘는 이미 경남도에서 문화재로 지정해둔 상태였다. 경남문화재연구원 박동백 박사는 “문화재로 지정한다해도 관리책임은 여전히 소유자에게 있는 등 관리면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며 “도굴당하면 한달에 한번 문화재를 둘러볼 겨를도 없는 담당 공무원만 시말서를 쓰고 있는 형편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남도에서는 최 장군 묘의 관리인에게 한 푼도 지원해주지 않고 있으며 최 장군의 문중인 통천 최씨쪽이 ‘사명감을 갖고’ 맡아달라고 그에게 부탁했을 뿐이다. 전남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구형 고분도 지난 86년 2월 지방기념물 85호로 지정됐지만 수년 전에 도굴당한 것으로 최근 드러났다. 해남군청 문화예술계 관계자는 “해남군에 54점의 문화재가 지정돼 있는데 정기적으로 다 둘러볼 수는 없지 않으냐”며 문화재로 지정된다해도 도굴꾼들이 노리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고분을 현장조사한 광주박물관 신상효 학예사는 “고분의 석실 옆면은 수십년 전에 도굴됐는데 뒤쪽은 기념물로 지정된 뒤에 땅굴을 파들어가 도굴한 것으로 보인다”며 “토기나 갑옷, 긴 칼 등의 부장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도난 문화재에 올릴 수도 없다. 고분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비지정 문화재들, 도굴 집중표적
하지만 문화재청은 도굴이 이미 ‘끝물’에 이르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우리가 파악하기에 도굴은 이제 거의 없다. 1년에 신고 들어오는 것도 전국에서 한두건에 불과하다. 신고가 없어서가 아니라 도굴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굴이 대부분 일제시대에 이미 다 이뤄진데다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지정해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박익 묘처럼 무덤 수난시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라면 발굴작업 도중 소주병이나 라면봉지를 발견하는 일은 흔하다. 도굴꾼들이 이미 다녀간 곳을 뒷북치는 셈이다. 문화재 도굴의 집중표적이 되는 것은 전국 각지 산야에 흩어진 비지정 문화재들이다. 비지정 문화재 중 마구잡이로 훼손이 이뤄지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하남시다. 94년부터 두 차례 이 지역의 지표조사를 한 세종대박물관에 따르면 하남시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방대한 유적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숨통을 튼 데 비해 학계와 지자체, 문화재청의 무관심 속에 하남시의 유물은 속수무책으로 방치돼 있다. 세종대박물관장 최정필 교수는 “24개의 절터가 발견된 금암산은 경주 남산에 필적하는 유적 밀집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2년 전에 발견됐던 유물들이 벌써 대분분 사라졌을 만큼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눈에도 하남시의 유물 훼손은 매우 심각하다. 우리나라 최대철불상인 보물 332호 고려시대 광주철불(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대좌로 추정되는 유물이 여염집 장독대로 쓰이고 있는가 하면 사찰의 기단석이 민가의 주춧돌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심지어 화분받침 따위의 정원 단장용으로 고대 유적들이 이용되고 있고 명문기와도 대량 발견됐지만 지금은 부서진 기와조각들이 밭고랑을 만드는 데 이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하남시의 대규모 유적지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훼손상태를 보이고 있는 곳은 고대 하남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하사창동의 천왕사지이다. 유물 분포로 봤을 때 1만평 이상으로 추정되는 천왕사터에는 아직 시멘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물류창고들이 들어서 있다.
문화재 발굴, 해마다 폭발적 증가
천왕사지에서 3대째 살아온 주민 김용준(34)씨는 “유물이 나와도 시쪽에서는 아무 말도 않다가 옮겨놓으면 왜 팠냐고 한마디 하는 정도다. 비닐하우스 하나를 만들 때도 큰 초석이 여러 개씩 나오지만 근처 도랑에 그냥 갖다 버린다”고 대수롭잖게 말했다. 이런 문화재 훼손에 대해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등이 거세게 반발하자 문화재청은 뒤늦게 지난 9월21일 심의위원회를 거쳐 천왕사지 발굴을 허가했다. 최정필 교수는 “지금이라도 시차원의 문화유적보존위원회를 만들어 체계적인 보존대책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남시는 난색만 표하고 있다. 하남시는 “1만평에서 3만평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천왕사지를 복원하려면 3천억∼5천억원까지 보상비용이 필요한데 시의 예산은 턱없이 모자란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문화재 발굴은 지난 한해 331건 등 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90년대 초만 해도 40∼50건에 이르던 발굴 건수는 95년 140건으로 늘어난 뒤 해마다 30∼40%씩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대규모 개발사업이 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 발굴비용은 원인자 부담이 원칙이다. 묻혀 있던 문화재를 훼손(문화재법은 발굴 자체를 훼손으로 본다)하는 사람이 직접 발굴비용을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이 작은 집을 짓는 등 기본생활을 위한 경우 또는 특별한 개발이익이 없을 경우에는 국가에서 지원해준다. 하지만 한해 국가에서 발굴에 지원해주는 비용은 2억∼3억원에 불과하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이런 규정이 문화재가 나오면 그대로 덮어버리거나 파괴해 없애버리고 마는 ‘문화재 테러’를 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