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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난국을 부른 검은돈 망령 권력형 비리로 국가경제에 치명타 안겨… 부패의 자양분을 어떻게 제거할 건가
아크월드를 비롯해 이 사건에 연루된 기업들은 평소에는 은행 문턱에도 가보지 못할 정도로 경영실적이 미미하거나 재무구조가 취약하다. 검찰 조사에서 77억원을 불법대출해간 것으로 드러난 록정개발의 경우, 외부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조차도 99년 결산실적에 대한 감사보고서에서 “부채가 자산을 76억원 초과하고 60억원의 적자를 내 회사의 존속능력이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냈다. 아크월드나 SE테크 등 나머지 기업들은 자본금 규모와 매출이 구멍가게 수준이어서 아예 외부감사 대상에 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기업들에 은행지점장의 재량으로 수십, 수백억원씩 대출해줬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외국인투자자들이 우리 주식시장에서 돈을 썰물처럼 빼나가게 한 데에는 포드의 대우차 인수포기보다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한다. 대우차의 매각차질은 그 배경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지만, 국민혈세 6조5천억원을 지원받아 경영정상화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국내 최대은행이 이렇게 여신관리와 내부통제시스템이 허술하다는 게 드러났는데 외국투자가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한 외국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말이다.
보이지 않는 압력 뒤엔 부패의 사슬이
어쨌든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은 불가사의와 오리무중투성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권력자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금융권에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경험하고서도 권경유착의 관행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권력형 비리일수록, 정부가 제대로 진상을 파헤치기보다 적당히 덮으려는 모습을 보여 결과적으로 의혹을 더욱 부풀리는 것도 상습적이다.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했던 서민들만 허탈할 뿐이다.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척결대상’이다. 국민의 정부도 출범 이전부터 ‘부패척결’의 칼을 빼들고 나섰다. 과거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했고, 더욱이 ‘IMF 사태’라는 뼈아픈 경험이 있어서 국민들은 정부의 부패척결 의지에 큰 기대를 해왔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집권후반기에 들어선 지금, 국민들의 기대는 ‘역시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요즘 우리 경제의 중추인 금융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횡령사고, 대주주와 작전세력들이 낀 주가조작, 재벌계열 금융기관들의 부당내부거래와 고객재산 편법운용 등등. 도대체 금융시장에 준법의식과 질서는커녕 기본적인 도덕조차 실종하지 않았느냐는 느낌을 들게 한다. 금융계 종사자들은, 옷로비 사건을 비롯해 끊이지 않는 권력형 비리 의혹사건과 힘없는 사람들만 고통을 겪게 하는 구조조정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힘있는 권력실세나 여기에 줄을 대고 있는 기업인들의 비리의혹은 덮어둔 채 말단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들의 ‘생계형 비리’만 문제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산업노조의 하익준 정책부장은 “금융권을 권력자의 이익을 관철시켜나가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정치권과 정부의 태도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현 정부 들어서 금융권에 항상 생사여부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줌으로써 권력과 대주주의 이해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더 약화됐다”고 주장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려면 구린내 나는 돈, 즉 검은돈의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 반사회적 범죄행위나 권경유착을 통해 조달되는 검은돈은 여러 단계의 세탁과정을 통해 꼬리를 감춤으로써 합법적인 자금으로 탈바꿈한다. 대부분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서는 돈세탁 과정이 들어 있고, 바로 이 돈세탁 때문에 부정부패의 연결고리를 추적할 수 없게 만든다. 더구나 요즘 검은돈들은 금융기관의 음성적 도움까지 받고 있는 형편이다. 한빛은행 관악지점의 불법대출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은행창구에서 기업비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스스로 차명계좌를 여러 개 만들어 자금관리를 해주는 것은 금융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말에 적발한 한 상장기업의 주가조작 사건에서는, 6개 증권사가 대주주의 차명위탁계좌를 관리해주면서 수표를 받을 때 창구직원이 자기이름으로 이서를 해준 사례도 있었다.
금융기관의 음성적 도움받는 검은돈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의 자양분인 검은돈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문가들도 몇 가지 정황증거를 근거로 복잡한 공식을 도입해 추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뒤 우선 기업들의 검은돈 조성부담을 짐작해보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매출액 1천억원 이상 업체 100개사(매출액 1천억원 이상)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법정준조세의 부담규모 실태를 분석해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서 여러 가지 준조세 항목 가운데, 정당후원금과 국가기관 및 관변단체 등에 대한 지원금이 상당부분 차지하는 ‘기부금과 성금’의 증감내역이 눈길을 끈다. 99년에 1개사당 평균 기부금 및 성금 부담액이 41억7400만원으로, 98년의 21억1천만원보다 두배 늘었다. 전경련은 이런 식으로 부담이 늘어나서는 기업을 할 수 없다며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의 기부금 모금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주거나 모금 및 집행내역을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뒤 오히려 늘었다
민·관 연구기관도 국내 검은돈의 규모가 심각한 수준임을 경고하고 있다. 자유기업원은 탈세규모와 현금통화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탄지분석법’으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를 추정했다. 그 결과 98년 추정액이 예년보다 훨씬 늘어난 약 116조원이며,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26.1%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기업원 분석에서 지하경제 평균추정치가 GDP의 25%를 넘어서는 것은 60년대 말 이후 98년이 처음이다. 그만큼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음성적 검은돈의 거래가 늘었다는 분석인 셈이다. 검은돈이 하얀돈으로 둔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세탁 과정을 거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준오 국제형사법연구실장은 ‘90년대 한국의 돈세탁 관련사건 분석보고서’에서 국내 돈세탁 규모가 적게는 54조원에서 많게는 169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장 실장은 “90년에는 불법 돈세탁 유형이 5가지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17가지 유형이 발견됐다”며 “정보기술과 금융기법의 발달로 돈세탁 수법도 날로 첨단화, 지능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98년부터 한시적으로 검은돈의 양성화조처가 나왔고 기업회계제도의 강화 등으로 검은돈이 조금 줄어들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건설업체 등에서는 비자금 조성 및 뇌물수수 관행이 여전하다”면서 “각 은행에는 주요거래기업의 비자금 담당 직원을 두고 유령고객의 도장과 고객번호 20∼30개씩을 통해 비자금을 관리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검은돈하면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만 떠올리지만, 사실 민간부문에서만 오고가는 검은돈도 만만치 않다. 힘있는 대기업이나 금융기관과 그렇지 않은 곳과의 거래에서 벌어지는 검은돈 수수관행은 공공부문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IMF체제 이후 일자리의 안정성이 흔들리면서 일부 대기업 임직원 사이에는 ‘좋은 자리에 있을 때 한몫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또 구조조정 과정에 있는 기업에서는 대주주나 경영진이 자산을 처분하면서 이중장부를 꾸며 회삿돈을 착복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마련한 불로소득을 해외에서 도박으로 탕진하다가 꼬리를 잡힌 기업인들도 있다. 국세청은 지난 7월부터 해외에서 카지노 도박을 일삼은 외화낭비 호화생활자 65명을 상대로 특별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는데, 대부분 기업인들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해외동포들의 제보와 해외에서 신용카드 또는 현금서비스 금액이 갑자기 늘어난 호화사치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지출내역을 조사해 수십명의 기업인 명단을 확보했다”면서 “외환위기를 겨우 벗어난 단계에서 해외에서 도박으로 거액을 탕진한 기업인들은 대부분 탈세로 마련한 회사 비자금을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은돈은 단순히 공직자나 기업인들의 도덕성 결여에서만 싹트는 게 아니다. 검은돈이 활개치도록 하는 제도적 환경이 문제이다. 의식개혁과 윤리의식 제고와 더불어 부패유발 환경을 제거하고 여러 가지 부패통제시스템을 만들어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들은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형식적인 윤리선언만 요란하게 내놓을 뿐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는 게을리했다. 거꾸로 정부는 지난 98년 초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유보함으로써 검은돈이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종합과세제가 내년부터 부활하지만, 지난 2년 동안에 자금출처를 묻지 않는 5년만기 무기명채권 발행을 4조6천억원어치나 허용해 검은돈이 합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다.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 고용안정채권, 증권금융채권 등 3종류로 나온 비실명채권은 요즘 채권시장에서 액면가격보다 훨씬 높은 값에 나오더라도 물량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수익률이 마이너스이더라도 자금출처를 묻지 않는다는 이점 때문에 수요가 몰리고 있는 것이다. 또 정부가 지난 7월 말부터 투신사 지원용으로 허용해준 비과세수익증권도 일반 배당이익에 대한 과세는 물론, 종합과세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아 검은돈의 은신처 구실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검은돈은 부패한 정치인이나 공무원들, 경쟁이 아닌 로비로 한몫을 챙기려는 천박한 기업인들에게만 이익을 줄 뿐 국가경제 전체에는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 사회적 비용을 높여 전체 기업과 소비자들에게도 손해를 끼친다. 검은돈이 늘어날수록 경제·금융통계에 오류를 발생시키고 정부의 경제정책에 혼선을 야기한다. 무엇보다 열심히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세부담을 증가시키는 것은 물론 일할 의욕을 떨어뜨린다. 앞으로는 국제교역과 투자에서도 검은돈이 큰 장애물이 된다. 얼마 전 국제투명성위원회(TI)가 발표한 ‘2000년 국가별 부패지수’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90개국 중 48위를 차지했다. 선진국들은 물론이고, 경쟁상대인 싱가포르(6위)나 대만(28위)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한국 밑에 있는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많은 나라는 눈을 씻고봐도 찾을 수 없다. 한국의 순위는 95년 27위에서 97년 34위, 98년 43위, 99년 50위로 계속 떨어져 상대적 부패정도가 더욱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국제투명성위원회가 지난해에 처음 발표한 뇌물성향지수에서는 수출주도국 19개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상거래에서 뇌물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각국이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고 국제경제기구들이 국제상거래에서 뇌물공여와 같은 부패행위를 척결하기 위한 부패방지라운드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심하게 부패했다는 국제사회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젠 시민의 힘으로 투명한 사회를…
부패공화국이라는 딱지를 떼려면 검은돈이 활개치는 환경을 개선하고 치유하려는 뼈를 깎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한국외국어대 이은영 교수(행정학·부패방지입법 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지금까지 정부가 반부패 대책에 대한 여러 가지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놓고서도 제대로 실천한 경우가 없다”면서 “실효성 있는 부패방지법이나 자금세탁방지법 제정을 시민사회의 힘으로 이뤄내 맑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나 정치권에는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얘기이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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