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표지이야기] 억울한, 단 한 사람을 위하여… 판결 오류를 막고 사법불신을 제도적으로 씻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하루 재판 건수가 무려 103건
곧이어 진행된 증권거래법위반 불구속 피고인의 재판은 30초도 채 안 돼 끝났다. 증권예탁원에 뭔가를 조회해본 뒤 다시 재판하겠다는 것이 판사가 한 말의 전부였다. 돌아서는 피고인의 주눅든 얼굴에서 ‘아무리 피고인이지만 법정까지 헛걸음시켰다’며 불만을 품은 표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뒤로도 사기, 아리랑치기, 절도 피고인 등 20여명의 각종 형사 피고인들이 쉴새없이 법정을 들락날락했다. 낮 12시를 이미 넘겼지만 오전으로 예정된 재판 피고인들은 아직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거의 1분 간격으로 이어지는 재판은 차라리 기계적이다. 짤막한 검찰심문이 끝나면 “전부다 인정하죠?” 하는 판사의 말이 이어지고 “네” 하는 피고인의 한마디, 뒤이어 구형이 내려지고 판사가 선고날짜를 지정하는 것으로 끝이다. 이날 하루 이 담당판사가 맡은 재판은 무려 103건. 오전 9시30분 35건을 선고하고 10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70여건을 처리해야 한다. 법정 출입문 앞의 ‘재판중’이라는 불이 꺼지는 것은 여느 재판과 마찬가지로 밤이 돼야 할 것 같다. 시간에 쫓기듯 재판을 진행한 담당판사의 고충을 이해할 만하다. 법원 판결에 대한 불신은 ‘양질의 재판 서비스’가 이뤄지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나아가 재판의 질은 법관의 수와 맞물려 있다. 99년 말 현재 법관 1인당 연간 사건처리 건수는 지방법원 판사가 무려 5767건, 고등법원 판사가 201건, 대법관이 1916건이다. 밀려드는 재판에 시달리다보니 재판마다 엄밀한 사실확인 과정을 거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다. 서울지법 한 판사는 “하루 70∼80건을 처리하고 그 중 20여건은 증인신문까지 하는 실정에서 재판은 수사기관의 수사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무죄가 진실이라 하더라도 혐의를 벗어나려면 당사자 스스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재판부가 범행의 전 과정을 조목조목 따져 적절한 형량을 산정할 여유도 없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퇴임한 정해남 부장판사는 “지난 15년 동안 매달 수백건의 사건을 정신없이 처리하면서 내심 소송 관계인의 애타는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 늘 죄를 짓는 심정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사건마다 수백쪽에 이르는 기록을 다 살펴보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라고 표현한 법관도 있었다. 법관의 수를 늘리는 것 외에 판결의 오류를 막고 사법불신을 제도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배심제 도입 △법조일원화 △헌법소원 대상에 법원판결을 포함시키는 방안 △재심요건 완화 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법원 판결도 헌법소원 대상에 넣어야
영미법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배심제는 시민 12명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를 판단하고 유죄로 결론이 내려질 경우 판사가 형량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김용섭 공보관은 “배심제를 하면 판사는 형량만 정하면 되므로 오히려 편하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매수될 우려도 있고 여론몰이에 휘둘려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며 도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배심제를 넘어 참심제까지 주장하고 있다. 참심제는 재판부가 아예 판사 1명과 시민 2명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독일에서 도입하고 있다. 박 교수는 “재판을 판사 1명 또는 3명이 하는 곳은 우리와 일본뿐이다. 우리는 시민이 사법에 참여한 역사가 단 한번도 없다”며 “시민의 건전한 상식을 재판에 도입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판사의 경험부족과 ‘법원 엄숙주의’를 보완하기위한 법조일원화도 법조 일각에서 제기돼온지 이미 오래다. 법조일원화는 초임판사의 평균 나이가 너무 낮아 법률 실무나 사회경험이 부족한 탓에 일정한 경력을 갖춘 변호사 중에서 자질, 인품 등을 고려해 판·검사를 임용하자는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이 제도를 도입하면 재판의 신뢰성을 높이고 소신있는 재판과 사법부 민주화 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게 도입을 주장하는 쪽의 논리다. 서울대 법대 한인섭 교수는 “법복을 벗은 뒤 과거의 판결이 잘못됐다고 토로하는 판사들이 꽤 있는 것은 경험있는 법관에 의한 재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말했다. 법원행정처가 최근 몇년 동안 30여명의 변호사를 판사로 임용하긴 했지만 이는 법원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서이지 법조일원화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 김용섭 공보관은 “이상적인 제도이긴 하지만 능력과 인품을 갖춘 변호사를 법원으로 끌어오려면 처우 등에서 어렵다. 현실적으로 높은 수입을 버리고 판사로 오겠다는 변호사가 얼마나 될지 걱정”이라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 97년 법조계를 뒤흔들었던, 법원판결도 헌법소원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여부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권한 다툼 성격을 갖고 있다. 헌법재판소법 68조는 헌법소원 대상에서 법원판결을 제외하고 있다. 물론 판결이 헌법소원에 포함돼 4심제가 되면 법적 안정성과 관련해 사회적 낭비를 피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럼에도 헌법적 판단을 그르친 법원의 판결은 헌법소원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국대 정연주 교수는 “법령의 해석과 적용은 법원의 고유권한이라고 대법원이 주장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가 법령해석이고 어떤 경우가 헌법부분인지 딱 자르기 어렵다. 법원의 판결을 견제하는 장치로서 재판을 헌법소원에 넣는 방안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법기관끼리의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 좀더 신중한 법원판결을 유도함으로써 국민들의 기본권 보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재판도 헌법소원에 포함시키고 있는 독일의 경우 법원판결이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취소되는 비율이 2%도 채 안 된다. 자연히 낭비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도 잘못된 법원판결을 예방하는 효과 때문이라는 게 헌법재판소의 주장이다.
재심청구 비율을 높이자
재심제는 현재의 3심제 틀 안에서 ‘있을 수 있는’ 법관의 잘못된 판결로부터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장치이다. 재심은 확정판결을 받은 뒤에 이를 뒤집거나 바꿀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됐을 때 또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절차다. 민사소송법 제422조와 형사소송법 제420조의 재심사유는 판결의 증거로 쓰인 것이 위조된 것일 때, 허위진술이 판결의 증거로 사용된 때, 원판결보다 가벼운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재심청구가 인용되는 비율은 크게 낮다. 지난해 재심이 접수돼 처리된 민사사건 442건 중 인용된 것은 57건이고, 95년에는 재심이 청구된 형사사건 89건 중 인용된 것은 5건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재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하지만 대법원에 상고되는 연평균 4천여건의 형사사건 중 완전무죄 또는 일부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되는 사건이 100여건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재심사유는 지금보다 폭이 더 넓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줄곧 나오고 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 김인겸 판사는 “재심사유는 그동안 특별히 넓어진 게 없다. 재심은 확정판결을 뒤집는 것이므로 받아들이는 데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며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해보자는 피해의식 때문에 재심을 청구하는 경우도 많은 만큼 사유를 오히려 제한해야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심을 무작정 받아들여 재판이 4심, 5심까지 계속된다면 사적분쟁을 최종적으로 종결시켜주는 법원의 존재의미가 없어진다는 게 재심사유를 제한하자는 대법원의 논리다. 이에 대해 김형태 변호사는 “재심은 대개 과거에 재판을 받을 때는 몰랐던 증거가 발견돼 청구되는 것인데도 법원은 증거가 새로움보다는 무죄가 나올 정도로 ‘명백한’ 증거가 있을 때만 받아들이고 있다”며 “재심을 극히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데는 ‘확정판결은 곧 진실’이라는 법원의 권위주의적 발상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법원의 판결과 검찰수사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경우 피해자가 보상받을 길은 물론 있다. 국가를 상대로 구속돼 있던 기간 동안에 대해 형사보상을 청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가행위는 공정하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보상’한다는 차원이지 잘못에 대한 ‘배상’이 아니다. 한 법조인은 “법원은 권위를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열 사람의 범인을 놓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억울한 한 사람이 처벌되지 않도록 하라’는 법 격언을 과연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