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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재판을 재판한다! 한국사회에서 법관의 판단은 과연 영원한 성역인가… 판결에 대한 문제제기 봇물
지난 8월 말. 참여연대는 무려 1만명의 법조인에게 서신을 보냈다. 판사, 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사법연수원생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었다. 이 단체가 우송한 서신은 한 재판부의 판결문. ‘삼성의 전환사채 발행이 유효하다’고 결론내린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재판장 변동걸 부장판사)의 ‘삼성전자 전환사채발행무효소송’ 항소심 판결문이다. 참여연대는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한다는 뜻으로 “그렇다면 판결의 정당성 여부를 모든 법조인에게 물어보겠다”며 나름의 시위를 한 셈이다. 이 행동은 법조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특정 판결문이 잘못됐는지 여부를 공개적으로 법조인들의 심판대에 올린 일은 사법사상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법조인 1만여명에게 편지 띄운 참여연대
이 두 사건은 단지 일과성 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모두 판사의 판결에 대해 공개적으로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재판은 공정한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나? 진정 판사는 사회의 실정을 이해하고 인간의 아픔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한국의 재판은 과연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재판’인가? 삼성전자의 전환사채발행 무효소송에 대한 서울고법의 판결은 이런 물음에 대해 분명히 “그렇다”는 답을 자신있게 내놓지 못한다. 아니 그렇지 못하다는 쪽에 가깝다. 김진욱 변호사는 “삼성전자 판결은 그 자체로 논리적인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을뿐더러 편법증여라는 재벌의 세습관행을 법적으로 용인해준 잘못된 판결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김 변호사는 “재판부가 주주총회는 필요없고 이사회 결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이사회 결의가 없었다는 게 인정되지만 일단 전환사채를 발행한 이상 문제될 게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또 “재산상속 증여를 목적으로 이재용씨에게 특별히 싼 가격으로 발행한 점이 인정되지만 거래의 안정성을 위해 유효하다는 판결 내용 또한 부당했다”고 꼬집었다. 상지대 이동승 교수도 “(문제의 판결은) 회사법의 기본원리를 무시한 채, 경영권 세습 차원에서 발행된 것인데도 사안의 본질을 외면했다”고 지적했다. 서울지법 한 현직판사 역시 “해당 상법 조항 적용에 있어서의 잘못뿐만 아니라 이사회 결의절차를 ‘사소한 것’으로 판단한 것도 문제가 있다”면서 “재판부가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그 쪽으로 다가서려 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재판을 담당한 변동걸 부장판사는 “이사회 결의 등 내부 절차에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환사채가 발행된 이상 유효로 인정해주는 것이 관례”라며 “재벌상속 부분까지 재판부가 감안하면 도리어 입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와관련 한 판사는 “재판에 대해 개인이든 단체든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면서도 “(판결문 보내기 운동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사법부의 독립을 해치는 것이 될 수 있는 만큼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자칫 사법부의 독립을 해칠까 우려된다는 것이다. 판결에 대한 문제제기는 시민단체나 일부 법조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9월6일 서울 안국동의 한 카페. 일단의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토론이 한창이다. 이들은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를 후원하는 시민들로 박경자(수필가)씨를 비롯해 백학창, 강현기, 강승옥, 최영자씨 등이다. 대체로 검·경의 수사나 법원의 판결로 부당하게 권익을 침해받았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달마다 모임을 갖고 자신과 동료의 권리구제를 위해 힘쓰는 한편 사법기관의 부당한 권력행사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지 않는 여러 방안을 토론하고 때로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박경자씨는 지난 95년 6월 ‘사법제자리놓기 시민모임’을 결성해 사법감시 활동을 벌인 바 있다. 이들 외에도 판결과 사법부에 문제제기를 하는 또 다른 시민들도 있다. 조남숙 김경재 남귀옥 이차남 조금순씨 등이다. 이들은 지난 8월19일 청와대 앞에 집결해 대통령 면담과 일부 판검사의 파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날 밤 12시께 경찰 닭장차에 실려 수원지역에 내팽겨쳤다. “우리가 고소한 비리 판검사들이 비리를 저지른 일이 없다면 우리를 무고죄로 기소한 뒤 법정에서 그들의 정당함을 밝혀라!” 이들은 지난 7월10일부터 19일까지 열흘동안에도 청와대 앞 통의동파출소에서 캠핑아닌 캠핑생활을 하며 이른바 “비리 판·검사 파면”을 외치다 역시 이날 밤에 경찰에 의해 곳곳에 버려지는 신세를 겪었다. 여하튼 단 한번 공개적인 토론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던 판사의 판결이 서서히 공론의 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동아대 허일태 교수는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저지를 수 있는 오류 및 법왜곡행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핀다. 사실관계의 조작 및 판단오류,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법적용, 그리고 양형에 대한 재량권의 남용이다.
판사, 잘못된 판결로 문책받은 적 없다
서울지법 소속 한 판사는 “김기웅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판결심리를 따져볼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 내부조직 안에서도 이에 대해 반성하는 논문이나 논의도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실제로 직접적인 판결과 관련해 판사가 법원 내부에서 문책을 받거나 논란이 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부당한 법해석을 내리는 잘못된 법적용도 또 하나의 ‘사법살인’이다. 법조인들은 50년 6·25당시 최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받아 한강교를 폭하했다가 그해 9월 육군본부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른바 최창식 대령 사건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최 대령은 뒤에 사후 14년이 지난 1964년 10월23일에 무죄선고를 받았다. 지난 95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도 비슷한 경우다. 양형에 대한 재량권 남용도 판사들이 빚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오류. <한국 양형론>을 펴낸 숙명여대 이영란 교수는 이 책에서 서울지법에서 다룬 폭력 절도 사기 강도 등 323건의 사건에 대한 15개 재판부의 판결을 분석한 결과 비슷한 유형의 사건을 놓고 어느 법관은 집행유예 1년 이하의 비교적 가벼운 형을, 다른 법관은 실형 18개월 이상의 비교적 무거운 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납득할 만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한달만 교도소에서 살아봐도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라며 “국민이 불만을 품을 정도로 법관별로 양형이 들쭉날쭉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 김인겸 판사는 “우리의 경우 양형기준표는 없다. 일부 교통사고 등을 놓고 객관화된 양형기준표가 가능한지 시험적으로 검토해보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형사소송법이 정하고 있는 판사 자유심증주의는 어떤 증거를 채택해 사실을 확정하고 양형을 어떻게 정할지를 전적으로 판사의 양심에 맡기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복잡한 인간사에 대한 경륜부족
즉 고의든 과실이든 판사들도 얼마든지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법조인들은 먼저 판사들의 과다한 부담을 큰 문제로 꼽는다. 99년 12월 현재 판사 1인당 한햇동안의 재판처리 건수는 지방법원 판사의 경우 무려 5767건에 이른다. 밀려드는 사건을 떠안아 처리하는 데 시달려 밤 늦게까지 사건기록에 매달리는 현실에서 법정에서 소송 당사자들의 딱한 사정을 충분히 들어줄 여유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물론 전관예우 등 전반적인 법조계의 부조리나 정치권력에 의한 외압의 영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부 법조인들은 복잡한 인간사에 대한 경륜부족을 지적하기도 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한 변호사는 “되도록 외부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깨끗하게 법원에 갇혀 엄정하게 판결을 내리고 있는데 그런 판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이 판사들의 말”이라며 “판사의 지능과 능력은 우월한 게 분명하지만 판결이 법률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사람들과 만나 인간적 정을 느껴보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하대 김민배 교수(법학)도 “법관이 사회와 담쌓은 채 특권화된 생활만 하고 있으니 편향된 생각을 갖기 쉽다”면서 “사회이슈에 대해 고민해보고 참여하면서 사회와 끊임없이 교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법관의 나이에서도 잘 드러난다. 99년 말 현재 전국 판사 1327명 중 26∼30살이 47명, 31∼35살이 434명, 36∼40살까지가 375명으로 856명이 40살 이하다. 각종 분쟁을 종식시키는 최종적인 수단으로서 판결을 내리는 데 너무 ‘젊은 조직’인 셈이다. 그러나 대법원 김용섭 판사는 “젊은 판사들이 세상물정을 몰라 폭넓은 이해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일리가 있지만 그만큼 사회의 부정부패나 비리에 그래도 덜 오염된 곳이 법원과 판사”라고 반박했다.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10년마다 재임용되는 제도와 인사 때문에 윗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는 100% 독립된 판결을 하기 쉽지 않은데다 국제화 시대를 발맞추기도 어렵다”면서 “판사신분이 종신까지 안정될 수 있도록 전체적인 법조계 시스템을 고쳐야 이런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못된 판결은 피해자의 인생을 좌우한다
판결의 오류 및 법 왜곡행위는 법과 판결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나치게 높은 항소율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의 민사 1심 합의부 사건 4만1천여건 중 9691건이 항소돼 35.8%의 항소율을 보였다. 고등법원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한 것은 3173건으로 항소심 판결사건 중 44.4%가 상고됐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각국의 사법제도가 다른 만큼 항소율을 외국과 단순비교하는 것은 어렵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항소율과 상고율이 높은 데는 ‘끝까지 해보자’는 국민적 정서도 깔려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불신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판사는 신이 아닌 이상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3심제, 재심제 등 각종 제도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문제는 판사의 판결에 과실이 있어도 문제삼은 게 단 한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재판은 판사 개개인의 자기통제에만 맡기고 있는 것이다. 판사의 판결에 의문의 여지를 주지 않는 풍조가 바로 판결을 성역화하고 이런 상황이 법 왜곡행위를 일으킬 가능성을 높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에서는 재판의 주체가 직업적인 재판관, 즉 판사다. 세계적으로 아주 드물지만 여하튼 사실에 대한 판단과 법 적용, 모든 것을 판사가 결정한다. 그리고 판사들은 말한다. “판사는 오직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 이런 말대로라면 한국에서 모든 판결은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만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정작 판결로 말해야 했을 때 판사들이 침묵한 경우도 많았다. 되레 판사들은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이란 레토릭과 ‘사법부의 독립’이란 미명하에 ‘사법부는 어떤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판사의 판결에 대해서는 법원 밖에서 절대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완고한 성역을 쌓아왔다. 시대적 변화와 상관없이 고고하게 재판정에 앉아 ‘절대의 성역’을 지키는 걸 절대선으로 여겼으며, 사법부와 재판을 “비밀의 처녀성, 금기의 터부, 신비의 이상향”(영남대 박홍규 교수)으로 만들었다. 잘못된 판결이나 법 왜곡은 판사에겐 단지 불명예에 불과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인생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 만큼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판사의 판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고 사법개혁을 바라는 법조인은 한결같이 말한다. 시민이 판결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여러 제도적 방안 등도 허심탄회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전환사채 판결문 보내기 운동을 벌인 참여연대는 올해 안으로 시대착오적이거나 잘못된 판결 20∼50건을 수집해 공개할 예정이다. 판사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법원판결이 본격적인 사회적 논쟁으로 등장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이창곤 기자goni@hani.co.kr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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