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0년09월06일 제325호 

[표지이야기] A급, B급과 동침하다

광고·미술·영화 등 A급문화에 전방위적으로 파급되는 B급문화의 에너지


(사진/'못난이 모델,남루한 골목길' n016브랜드<나>광고)


B급문화가 A급문화와 몸을 섞는 시대다. 광고, 미술, 영화 등 전방위에서 B급의 에너지가 A급에 파급되고 있다. 요사이 장안에 화제가 된 n016 브랜드 ‘나’광고도 그렇다. 기존의 휴대폰 광고에서는 화려한 빌딩 숲을 배경으로 현대적인 미남 미녀가 출연해 휴대폰의 기능을 선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난 누구예요?”라고 외치는 촌닭 같은 아들과, “나도 공짜가 좋아”라며 웃는 러닝셔츠 바람의 아버지는 기존 광고시청자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광고평론가 조재원씨는 “못난이 모델, 남루한 골목길, 연출하지 않은 듯한 리얼카메라 기법 등 이 광고의 ‘퇴행성’은 세련과 첨단과 미를 추구하는 광고의 속성을 뒤집었다”라고 말한다. 이 광고에서 다루는 벙거지 머리 혹은 무스를 지나치게 발라 뒤로 넘긴 수탉머리, 까만 줄무늬 빨간 티셔츠 허벙한 바지 등은 분명 실생활에서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B급패션의, B급문화 코드다. 그런데 이 B급문화코드가 리얼카메라 기법을 만나니 오히려 다큐멘터리 같은 멋이 난 것이다.

유치하거나 혹은 진지하거나


(사진/박불똥씨의 포토콜라주 <사령관각하의 부스럼> )


B급코드가 미술과 만나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흔히 ‘이발소 그림’으로 대표되는 키치는 B급문화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데, 원래는 저속한 미술품, 사이비 그림이라는 뜻이다. 19세기 말, 그림에 대한 소유욕구가 확산되면서 만들어진 용어로 순수미술품과 그렇지 않은 미술품을 구별하기 위해서 쓰인다. 이러한 키치를 이용해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한 작가로 국내에서는 박불똥씨, 외국에서는 제프 쿤스를 들 수 있다. 박불똥씨는 애마부인이 선정적인 모습으로 앉아 있는 아래에 ‘대북삐라’를 확대해서 붙여 작품을 만들거나, 술집 성냥에 그려진 서양 누드모델을 확대해서 춘화처럼 보이게 하는 등 키치를 이데올로기를 뒤집어보고 일견 조롱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키치는 기존 가치를 전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미술평론가 이섭씨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브제, 얼핏 유치해보이는 오브제를 예술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전 시대의 가공된 표현방식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프 쿤스와 박불똥씨가 B급문화의 가벼움과 유치함을 무기로 주류를 조롱했다면, 반대로 B급영화의 진지함이 주류영화계에 놀라움을 던진 사건도 있다.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B급영화는 주류 자본이 만들지 않았으면서, 스타 출현이 없고, 동시에 상업적 지향성이 있는 대중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인디영화이면서 B급영화”라고 영화평론가 남동철씨는 말한다. 공업고등학교 출신 친구들의 고단한 삶과 죽음을 그린 이 영화는 전국에서 다섯개 극장도 확보 못하고 개봉했다가, 관객의 엄청난 호응과 쏟아지는 평론가들의 찬사에 힘입어 35㎜로 블로업해 확대 개봉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B급은 촌스럽다”는 기존의 관념을 깨부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경우로 평가된다.

이렇게 B급문화가 상업적으로 힘을 받으면서 A급문화와의 구별이 모호해진 대표적인 장르가 만화다. 전통적으로 만화란 일반인들에게 있어 예술의 한 갈래라기보다 오락을 위한 킬링타임용 문화상품으로 인식되어왔다. 많은 B급문화가 그렇듯이, 만화는 A급문화의 유통경로와 다른 경로를 통해 유통됐다. 즉 소설책이나 시집은 서점을 통해 유통되는 반면 만화책은 만화방이라는 독자적인 유통체계를 통해 향유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만화가 재평가되면서, 만화도 서점을 통해 많이 구해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슈피겔만의 만화 <쥐>가 피카소와 뉴욕 모던아트미술관에 나란히 놓여 있을 정도로, 만화가 A급문화에 속하는지 B급문화에 속하는지를 단정적으로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거칠지만 솔직한 낙서의 매력


(사진/박불똥씨의 혼합재료 설치 작품)


B급영화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예는 패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월남치마로 대표되는 아줌마 패션, 빤짝이와 스팽글로 대표되는 70년대 디스코 패션은 현대에 ‘빈티지 룩’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출현한다. 빈티지란 “케케묵은, 시대에 뒤진”이란 뜻으로, 엄마가 입던 옷, 중고상점에서 뒤져 온 듯한 옷을 새로 코디해 만든 패션이다. 현재 패션계에 빈티지 전문 브랜드는 없지만, 빈티지 스타일을 이용해 새롭게 디자인해서 출시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우아한 정장과 차분한 파스텔 색조에 질린 사람들에게, 후줄근하면서 알록달록한 70년대 풍은 새로운 충격이다. 또한 아무나 아무것을 가지고나 아무렇게나 코디할 수 있다는 게 빈티지의 매력이기도 하다.

전혀 상업적 성격이 없었던 B급문화가, 성장하면서 상업적 성격을 띠게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B급문화인 낙서에는 상업성이 없었으나, 낙서문화가 활발해지면서 낙서를 모아 출판하는 사람도 생겼다. <낙서금지: 대학가 낙서의 비밀을 파헤친다>(진선출판사)는 낙서 사진을 찍어 출판한 예다. 낙서 전용 사이트도 있다. 욕설섞인 낙서를 쓰게끔 만들어놓은 전문 사이트 www.eeeii.com, 사이버 화장실 www.crosswinds.net/~restroom 등이 대표적인 예다. 따지고 보면 익명게시판을 가진 사이트들 대부분이 온라인 낙서문화의 일부분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예의와 논리가 필요한 A급문화 토론에 반해, 거칠지만 솔직한 B급문화 낙서는 에두르지 않은 표현이 가능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이처럼 낙서가 대중에게 가지는 흡인력이 크기 때문에, 대학가 축제나 동성애 축제에서도 낙서보드를 만들어놓고 마음껏 의견을 쓰게 해, 대중의 참여도를 높인다. 또 대학 총학생회 중에서는 낙서장을 대학 내 화장실에 붙여놓아, “이번 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식으로 적어두고 여론조사의 장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결국은 B급의 승리다?





(사진/미술가 제프 쿤스의 작품으로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앞 야외 조각품 <퍼피>(위쪽)와 <마이클잭슨과 버블> )

이렇게 B급문화상품이 A급문화시장에 파고들 수 있는 에너지는, 역설적으로 B급문화의 가난하고 소외된 태생에서 유래된 것이다. B급문화의 시작이 ‘소자본, 주류문화 바깥’이었기에, 적은 자본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좀더 적나라한, 혹은 솔직한 표현을 구사해야 만했고, 주류문화 바깥에 있기에 A급문화적 검열이나 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대중음악평론가 성기완씨는 “지금은 고전적 할리우드 시대처럼 A급과 B급이 명확히 나눠져 있는 시대가 아니고, A급과 B급문화가 서로를 혼성모방하는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B급은 A급문화의 표현적 상투성을 고발할 수도 있고, 때로는 A급문화를 패러디하며, A급문화가 해내지 못하는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A급문화는 촌스럽고 정돈되지 않았지만 야성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B급문화에서 에너지를 빌려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B급의 승리다”라고 성씨는 덧붙인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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