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0년08월23일 제323호 

[표지이야기] 논쟁의 종말!

토론을 거부하는 지식인사회의 추한 자화상… 정당한 문제제기마저 시비걸기로 전락


(사진/우리사회의 토론문화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방송 토론프로그램들은 모두 제작과정 내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출연자 섭외부터 토론진행까지 성숙된 논리싸움보다는 목청높은 언쟁이 오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작가 황석영씨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작품이 조선일보사가 시행하는 동인문학상 수상 후보작으로 오른 것을 거부하면서 불거진 ‘동인문학상 파동’은 최근 가장 큰 화제가 됐던 논쟁이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소설가로 꼽히는 중진작가가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에 정면으로 맞붙었다는 점, 아예 그 신문에 앞으로 글이나 인터뷰조차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점에서 이 싸움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겨레21>이 황석영씨와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인 이문열씨의 인터뷰를 싣고 자세한 내용을 다루면서 더욱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특히 이 논쟁은 그 내용이 다른 딱딱한 시사적 논쟁과는 달리 누구나 재미있어할 만한 요소가 가득했다.

순식간에 식어버린 ‘동인문학상 파동’

당연히 이 논쟁은 문학계 내부를 벌집처럼 들쑤셨다. 파장이 계속되고 논쟁의 참여자도 늘어나면서 논쟁의 전선도 넓어졌다. 이문열씨가 인터뷰에서 반조선일보 단체들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고 말한 데 대해, 평론가 김정란씨는 반론을 펼치며 이씨에게 명백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 가운데 한명인 문학평론가 정과리씨와 고종석 한국일보 편집위원은 이 문제를 놓고 <한겨레21> 지면을 통해 설전 대담을 벌였다. 게다가 100여명의 지식인들이 황씨처럼 조선일보에 글을 싣거나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서 이 논쟁은 더욱 확산됐다.

그렇다면 순식간에 엄청난 관심을 끌어낸 이 논쟁은 과연 지금 어떻게 어디까지 진행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금방 타올랐던 것처럼 금세 식어버렸다. 지난 8월11일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단이 입장을 밝힌 것으로 마무리됐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단은 이날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수상 수락 여부야 작가의 권리겠지만 심사 여부는 엄연한 심사위원의 권리”라며 여전히 황씨의 소설 <오래된 정원>이 동인문학상의 심사대상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번 파동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동시에 심사위원단은 별도 기사 형식으로 심사절차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황씨에 대한 반론없이 문제를 조용히 끝내기로 했다. 김정란씨의 비판에 대해 이문열씨도 “논쟁을 하려면 격이 맞아야 한다”며 “반론 자체가 다른 반론으로 빠져들어가는 연쇄작용을 벌이며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반론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창 달아오르던 논쟁은 거품처럼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상대가 없는 논쟁, 핵심없는 대립만 난무

올해 상반기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던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양민학살 논란은 또 어떤 상황일까. 이 문제를 놓고 벌어진 문화방송의 <유시민의 100분토론>에서는 베트남 참전군인 출신 패널들과 양민학살이 실재했다는 학자쪽 패널들이 논쟁을 벌였지만, 양민학살이란 토론주제는 뒤로 밀리고 베트남 참전 한국군의 위상이 과연 용병이냐는 해묵은 문제가 토론회 내내 계속됐다. 다른 논쟁의 장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 그리고 그에 따른 후속조처 등 논쟁이 생산적으로 발전하기는커녕 서로의 메울 수 없는 인식과 감정의 골만 재확인하면서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한창 진행중인 문학계의 ‘문학권력’ 논쟁도 논쟁은 시작됐지만 진전은 없이 진행이 멈춰섰다. 정확히 말하면 논쟁의 양쪽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서 수그러드는 국면이다.

논쟁의 발단은 문학과지성사 동인인 문학평론가인 권오룡씨가 문학과지성사가 발간하는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발표한 글이었다. 이 글에서 권오룡씨는 신진비평가들을 익명으로 처리하면서 “이들이 ‘권력형 글쓰기’를 하면서 권력을 비판한다고 하지만 스스로가 권력이 되는 모순에 빠져 있다”고 꼬집었다. 이 글에 대해 곧바로 문학평론가 권성우씨가 비판하고 나섰다. 권성우씨는 문학과지성 게시판에 글을 올려 “권오룡씨의 글이 교묘하게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문학계에서 권위를 지니고 있는 문학과지성사를 문학권력이라고 비판한 내 글을 공격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문학과지성사쪽에 권오룡씨 글에 대한 반론을 기고할테니 지면을 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권성우씨를 지지하는 신진비평가들이 달려들면서 과연 문학권력이 비판받는 쪽이냐 비판을 가하는 쪽이냐의 쟁점을 놓고 사이버공간에서 논쟁이 뜨겁게 벌어졌다. 하지만 문학과지성사쪽은 권오룡씨의 글이 특정인물을 지칭하지 않고 익명처리했기 때문에 반론 지면을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매체에 소속된 한쪽이 논쟁을 촉발했지만 상대방은 받아칠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논쟁이 그냥 묶여버린 셈이다.

그들의 궤변 “입장은 있어도 토론은 싫다”









(사진/'동인문학상 파동'을 논쟁으로 이끈 사람들.위쪽부터 황석영,이문열,정과리,고종석씨)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논쟁을 접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통로는 방송사들의 토론프로그램들이다. 요즘에는 각 방송사마다 한두개씩의 토론프로그램이 있을 정도로 토론프로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글논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최고 학력의 전문가들과 지식인, 고위관료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앞서간다는 인물들이 출연하는데도 실제 방송에 들어가면 저잣거리의 말싸움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방송사의 토론프로그램들에는 화면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희한한 문제들이 가득하다. 제작진들은 일단 출연 섭외부터 막힌다고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이해관계를 따져본 뒤 마지막 순간에 약속을 번복하는 경우도 많고, 사안이 미묘할수록 출연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최근 문화방송 <유시민의 100분토론>에서는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다루기로 하고 찬반 양쪽의 인사를 섭외하다가 결국 아이템을 포기했다. 설립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모두 출연을 승낙했지만, 설립을 지지하는 쪽 인사들인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신현확 회장을 비롯해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 소설가 이인화씨 등이 모두 출연을 거절한 것이다. 진행자 유시민씨는 “평소 신문이나 잡지에는 주장강한 글을 자주 발표하며 분명한 자기 입장을 밝혀왔던 주요 우익 논객들이 한결같이 방송에 나가 토론하지는 않겠다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아쉬워했다.

출연자들이 논리적 토론을 벌이지 못하고 욕지기 수준의 감정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교육방송의 <난상토론> 프로그램에서는 방송이 끝나자마자 출연자 두명이 서로 주먹과 발길질을 해대며 난투극을 벌인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지난 3일 `SOFA와 주한미군'을 다뤘던 <유시민의 100분토론> 생방송에서는 토론을 방청하던 자유민주민족회의 소속 회원들이 자신들에게 발언기회를 주지 않는다며 토론을 마치는 순간 방청석에서 토론석으로 뛰쳐나와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 방송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윽박지르기로 무조건 자신의 우위를 주장하는 출연자들의 토론예절도 문제다. 교육방송의 <난상토론>에서는 미국의 교육제도를 토론하던 도중 한 출연자가 상대방에게 “나는 미국에서 3년 살았는데 당신은 도대체 미국에서 몇년이나 살았느냐”고 공박했다가 상대방이 “10년 살았다”고 대답해 머쓱해한 적도 있었다.

추상적 주제에 매달린 맥빠진 논쟁들

요즘의 논쟁들이 진행되는 추이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논쟁 양쪽 가운데 어느 한쪽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논쟁은 잘 진척이 되지 못하는 반면, 논쟁 당사자들에게 이해관계가 걸려있지 않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주제의 논쟁은 활발하게 진행되는 대비되는 현상이다.

요즘 가장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진 주제는 ‘영어공용화’ 문제였다. 중견소설가 복거일씨가 영어가 세계의 중심언어로 자리잡아가는 지구적 추세에 맞춰 국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고 주장하면서 촉발된 이 논쟁은 찬반 양쪽의 반론과 재반론이 잘 이어지고 있다. 소설가 이윤기씨가 민족어에 영어가 앞설 수 없다며 “인간이 국지성과 국지적 관계를 근거로 살아간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맞받아쳤고 다른 비판론이 이어지자, 정과리씨가 “중요한 문제는 타인의 도구를 활용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유산을 거기에 새겨넣어 실질적인 제것화를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복씨의 주장을 옹호하는 등 팽팽한 논리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주요 논쟁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하면서 ‘실명비판’을 통한 논쟁을 벌여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런 경향에 대해 “사회집단들이 자신의 이해가 걸린 부분에 대한 이견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논쟁을 통해 권위의 도전을 받는 쪽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논쟁이 불거지는 것을 아예 막는 행태가 문제라고 강조했다.

지식인사회의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

강 교수는 “대부분의 경우 권위에 대항하는 의로운 공분으로 논쟁이 시작돼도 비판을 받는 권력쪽은 반론을 펴는 대신 상대를 ‘마녀사냥꾼’으로 치부하거나 상대할 가치가 없다며 거부하는 식으로 회피한다”고 지적하면서, “논쟁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상대의 방식을 문제삼아 본질을 왜곡하는 것은 비판받는 쪽이 논리적으로 반박할 근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실리와 명분을 다같이 누리겠다는 속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당당하게 맞서 자신의 논리가 우월함은 보여주지 못하는가.”

또한 강 교수는 이런 이기주의를 도와주는 지식인사회의 ‘침묵의 카르텔’이 심각하다고 비판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사회 권력체의 문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해대면서도 그런 비판을 글로 써내면 ‘몹쓸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지식인사회의 풍토가 문제입니다. 건강한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이런 암묵적 유대관계가 지식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건전하고 생산적 논쟁이 나오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식이라면 내부자의 양심선언 등의 고발이나 논쟁의 격을 높이면서 논쟁을 성숙시키는 풍자며 독설까지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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