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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학생도 사람이다" 두발제한 등 전근대적 규제에 맞서는 10대들, 조직적인 권리찾기에 나서다
“야, 우리 도장 안 받았잖아.” “너 같으면 찍어주겠냐. 아까 아침에 노량진에서도 아저씨들이 말도 못 꺼내게 했잖아.”“앗, 저기 붙일 데 있다.”
“더이상 머리를 자르지 말라!”
한 친구가 가리킨 곳은 길가에 있는 구두수선가게. 셔터가 내려져 있고 그위에 김건모, 클론 공연포스터 등이 붙어 있다. 우르르 달려가 빈자리에 포스터 두장을 붙인다. 다시 두리번 두리번. 밀리오레 건물 경비원 세명이 나와 이들의 행동을 주시한다. 잠시 뒤 한 신발가게 앞. 옆 가게와의 사이 기둥에 공연포스터가 한장 붙어 있다. 이들 중 한명이 가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다. 포스터 내용을 본 주인이 대뜸 “학생이면 공부나 할 것이지” 하고는 그냥 들어가버린다. 허탕이다. 고교 1, 2년에 재학중인 주현이와 민우, 계환이, 우경이는 ‘인권과 교육 개혁을 위한 전국 중고등학생연합’(이하 중고등학생연합)의 회원들이다. 네 사람이 붙이고 있는 포스터는 이틀 뒤인 8월7일 열리는 ‘두발제한의 부당성과 해결책 모색을 위한 토론회’ 알림포스터. 네 사람은 명동거리를 헤매며 30여장을 붙인 뒤, 곧장 명동 유네스코 빌딩으로 향한다. 그곳에 이들의 둥지가 있다. 지난 7월26일 명동 한복판에서 ‘더이상 머리를 자르지 말라!’고 외치며 두발규제 반대 이색시위를 벌였던 바로 그 단체다. 최근 10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사이버공간에서는 두발규제 반대 서명이 시작한 지 석달 만에 서명자가 5만여명을 넘어설 정도로 열띤 호응을 받고 있고, 현실 공간에서는 청소년 인권찾기를 주제로 한 각종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눈에 띄는 점은 10대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걸 넘어서 온라인, 오프라인을 오가며 자신들의 시민적 권리를 스스로 행사한다는 것. 논리도 나름대로 정교하고 목소리도 조직적이다. 최근의 가장 큰 이슈는 역시 두발제한 문제다. ‘두발제한 지겹다… 인격 무시행동, 이제는 거부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인터넷사이트 노컷(www.nocut.n3.net)은 청소년 웹연대 위드(http://with.ch10.com)에서 만든 두발제한반대서명운동 홈페이지. 웹연대 위드는 10대들이 만들고 운영하는 3개의 사이트 운영진이 의기투합해 만든 사이트로 10대 커뮤니티 포털사이트인 아이두(www.idoo.net), 탈학교 문화모임인 사이버 유스(www.cyberyouth.org), 그리고 또다른 청소년 커뮤니티 사이트인 채널 텐(www.ch10.com) 등이 참여한다. 노컷에 올라온 10대들의 육성은 절절하다. 8월6일에 올라온 글을 잠깐 보자. “두발제한? 그렇다고 머릴 십자로 미냐? 학교가 무슨 교도소도 아니고.”(짜증삼빠이) “배는 고프고, 박박 미는 데는 5천원 들고.”(진홍) “자르고 다니는 선생님도 귀찮고 도망다니는 학생들도 피곤한데 그짓을 왜 하나 모르겠다.”(박성연) “선생님이 내세운 두발규제 이유는 ‘머리가 길면 술집에 나간다’는 것.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우리학교) “체육선생님이 가위를 들고 다니면서 애들 머리채를 쥐어잡고 자기 성에 안 차면 마구 잘라요. 미국이나 일본처럼 되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제발 개성을 죽이지 말아주세요.”(박은빛) “학교서 학생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구 무조건 머릴 자르라구 하는 데 화가 나요. 아무 말 못하고 무시당하는 게 더 화가 나요.”(라이)
교사·학부모 참여 속에 교육부에 건의서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학생주임은 아이들의 두발자율화 요구에 대해 “기강이 흐려진다”기 때문에 선뜻 수락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매번 단속하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흐트러졌을 때 그 때 한번씩 검사한다. 우리 학교는 앞머리 3cm가 기준인데, 그래도 별의별 짓을 다 한다. 한창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멋 내는데 신경쓰다가는 수업분위기가 흐려진다. 일정한 규율은 교육상 필요하다. 학부모들도 면학분위기 때문에 너무 풀어줘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두발제한반대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와 교육부에 각각 바라는 것은 “학교는 두발규칙을 비롯한 각종 교칙을 일방적으로 만들지 말고 선택권을 학생들에게 달라”는 것과, “교육부는 막연하게 자율화 권고만 할 게 아니라 시행령을 개정해 민주적으로 협의할 수 있고 최종 결정을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한 두발규제 완화가 아니라 학교 내에서 주체적인 권리를 찾자는 데로 모아지고 있다. 과거에도 두발규제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 두발제한반대운동을 펼치는 10대들은 대중을 설득하며 조직적으로 참여한다는 게 큰 차이다. 인터넷이라는 발달된 매체도 이들의 운동에 한몫 했지만, 나날이 신장되는 10대들의 인권의식도 큰 몫을 한다.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10대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말은 ‘헌법에도 보장된 우리의 인권을 돌려달라’는 것. 과연 학교 현장이 어떻기에 10대들은 헌법에도 보장된 기본권이 침해당한다고 여기는 걸까. 서울 ㅅ여고 1학년에 재학중인 장아무개(16)양은 등교길인 아침에 교문에서 벌어지는 일에 짜증을 넘어 스트레스까지 느낀다고 말한다. “용의복장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교복 치마를 들추고 속치마까지 입었는지 검사해요. 교실에서는 상의 속옷도 검사하고요. 우리가 뭐 범죄자입니까. 학생은 사람도 아닙니까.”
'청소년 인권선언’ 처음으로 발표
서울 ㅇ고교 2학년에 재학중인 김아무개(17)군은 방학하기 두달 전 황당한 일을 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급식시간에 외출증을 끊어서 라면을 사먹으러 나가는 길이었어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문에서 다짜고짜 잡아끌더니 옷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기까지 하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5, 6교시 내내 복도에 꿇어앉혀 놓았어요. 항의를 하자, 가위를 들고 와서 별로 길지도 않은 제 머리를 잘라 버리는 거예요. ‘난 구레나룻이 제일 보기 싫어’ 하면서. 속살이 아플 정도로 깊게 잘랐어요. 이렇게 자기 감정대로 학생들을 대해도 되는 겁니까.” 장양과 김군에 말에서 엿보이듯, 10대들은 나날이 바뀌는 사회환경과 의식구조에 조응하지 못하는 교육현장의 폐쇄성을 인권침해의 가장 큰 요인으로 여긴다. 언어폭력과 체벌, 성적이나 집안형편에 따른 차별 등 일부 교사들의 부당한 행위도 문제이지만 10대들은 이런 문제가 교육환경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 10대 네티즌은 “이 바닥이 이런 줄 알어. 근데. 이번만은 좀…”이란 말을 남기며 두발제한반대운동으로 촉발된 10대의 권리찾기 운동에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도 많다. 8월10일부터 12일까지 여의도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청소년 문화예술축제 2000행사를 여는 유쓰존(youth zone) 회원들도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어른들이 짠 판에 들러리 서는 게 싫다”며 기획부터 섭외, 준비, 진행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스스로 처리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같은 기간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열리는 청소년 유스페스티벌에서 함께하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유쓰존 회원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행사 내용은 청소년 인권선언. 행사 첫날 초안을 발표하고, 참여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마지막날에 최종발표하기로 계획돼 있다. 각종 설문조사와 인터넷 등에 오른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해 가급적 발랄한 표현을 쓰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중이다. 준비하고 있는 초안의 내용에서 눈에 띄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도록 지원받을 권리가 있어. △난 맞고 싶지 않다. 우리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일터에서든 맞지 않을 권리가 있어. △난 못생겼고, 공부도 못하고, 가난해 그리고 장애인이지만 나도 잘 하는 게 있어. 어려도 우리가 평등하다는 건 다 안다고. △알려고 하지마, 다쳐! 우리도 우리만의 비밀이 있어. △나 배우고 싶어. 배우기 힘든 상황이라면 나라에서 지원해 줘야지.△학교는 공장이 아니잖아.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고 싶어. △생각을 강요하지 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뭘 믿든 내 맘이야. △왜 내말 씹냐? 교칙은 우리가 정하는 거야. 그런 건 법에도 나와 있다고. △나 쉬고 싶어. 대학? 쉬고 싶다는데 웬 헛소리? △내가 어리다고 어른만큼 일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일한 만큼 대접해 줘. △내 정보는 내거야. 내가 알고 싶은 걸 알 권리가 있어. 사이버공간에서도 정보는 나눌 거야.
“우리도 당당한 소비자, 깔보지 말라”
교육수혜자, 문화생산자로서의 권리를 넘어 10대의 권리찾기는 최근에는 소비자운동의 영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다.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각종 소비자상담소에 상담문의가 는다는 것. 예를 들어 지난 2, 3월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모임’에 접수된 상담사례중 청소년 상담은 휴대폰 강제계약문제만 해도 30여건이 넘었다. 이 단체의 송보경(55) 대표는 “청소년들의 상담이 과거에 비해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다”며 그 배경으로 인터넷이라는 매체환경의 등장과 청소년의 사회인권의식 성장을 꼽았다. 실제 상담 내용도 지금까지는 주로 휴대폰, 학원, 학습교재 강매와 환불문제에 맞춰져 있었으나 점차 화장품이나 생필품의 영역으로도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10대들의 소비자주권 의식은 급속도로 팽창해온 10대 시장규모에 비춰보면 더딘 감도 없지 않다. 서울 ㅎ고교에 재학중인 차아무개(18)양은 물건을 살 때 불쾌한 일이 많다고 한다. 계산대에 오래 세워두거나 반말을 할 때가 가장 기분나쁘다는 것이다. 차양은 “방법만 있었다면 소송이라도 제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소비자주권이나 작은권리찾기에 대해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아요. 그런 내용도 교육과정에 포함됐으면 합니다.” 차양은 인터넷과 책을 뒤졌지만 거스름돈을 빨리 거슬러주지 않은 걸 문제삼을 수 있는 방법이나 판례를 구하지 못해 결국 포기했다고 섭섭해 한다.
사학비리에 맞서 싸우는 상문고생들
지난해 부여여고에서는 두발과 복장에 대한 교칙개정을 아이들 손에 맡겼다. 1박2일에 걸친 수련회겸 토론회 자리에서 학생들은 단발머리를 기를 수 있도록 하되 15cm 를 넘는 경우 교내에서는 묶고 다니자는 규칙을 정하고, 나름의 상벌규정까지 만들었다. 염색과 파마머리까지 등장하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던 교사들은 뜻밖의 결과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이 학교에서 근무하던 윤여관(36·미술담당) 교사는 “아이들에게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체적으로 행사할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의 인권을 찾겠다는 10대들의 목소리는 이제 봇물터지듯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긴 머리 잘라내듯 이들의 목소리를 더이상 마구 자르기는 힘들 것 같다. 이들이 와글와글 목소리를 내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정화기능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주는 지혜를 보이는 것도 훌륭한 교육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10대들의 인권의식은 우리 사회 인권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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