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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권력의 성에서 나와 대화하라 문학권력 논쟁을 지켜보며 ‘창비’와 ‘문지’에 보내는 한 젊은 비평가의 고언
문지의 이해할 수 없는 침묵
황석영의 이러한 선언은 이른바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성향의 지식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된다. 문학권력과 관련하여 우리는 황석영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학상의 상업주의와 사이비 권력 놀음 따위의 문제점이 지적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실상은 <조선일보>가 특정 문인 몇몇 사람을 동원하여 한국문단에 줄세우기식의 힘을 ‘종신토록’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창작과비평사(창비)의 백낙청 편집인은 자사의 자유게시판에 발표한 ‘편집인의 글’을 통해, 네티즌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된 창비와 <조선일보>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명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백낙청은 자신이 ‘조선일보 제몫 찾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며, 사이버 토론에도 열린 자세로 임할 것임을 피력했다. 며칠 뒤, 창비의 최원식 주간은 ‘문학권력 논쟁을 보면서’라는 게시물을 통해 최근 문단 일각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비판적 논의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표명하는 것과 동시에 “창비가 현실로 존재하는 정치 경제 언론 권력과 유착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다짐을 피력했다. 이른바 창비 진영의 문학인들이 보여주는 현실에의 적극적인 의사표명의 태도와는 반대로 이른바 문학과지성(문지) 진영의 문학인들은 침묵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권오룡의 ‘권력형 글쓰기에 대하여’라는 평문을 발단으로 시작된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창비 진영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나선 것과 비교해 보자면 참으로 기이한 사태다. 게다가 문지쪽은 논쟁의 와중에서 문학인들과 네티즌들의 비판이 예상외로 거세어지자 자사의 ‘자유게시판’을 폐쇄해버리는 상식 이하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문지의 침묵을 통한 입장 표명은 열린 대화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행위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한 가지 환기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이른바 ‘문언유착’이라든가 ‘문학권력’에 대한 가장 첨예한 비판은 김정란의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김정란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고종석과 권성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공식적인 문제제기는 물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 구조가 견고하게 작동되었던 것이다. 이 평문을 통해 김정란은 ‘문언유착’의 중심에 <조선일보>가 놓여 있으며, 대표적인 문학전문 출판사와 문인들이 이 신문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다는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창비, 거대담론에서 내려오라
(사진/위쪽부터 고종석, 백낙청, 김정란, 최원식, 정과리)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잠깐 다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가령 김정란의 이러한 견해와 황석영이 제기한 ‘동인문학상’에 대한 이의제기는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가? 나로서는 이 두 사람의 견해에 어떠한 질적 차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조선일보>의 문제성과 ‘문언유착’을 지적한 부분에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나로서는 창비 진영의 문학인들이 <조선일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공개적으로 피력하였다면, 다음과 같은 김정란의 격렬한 비판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도 몇몇 메이저 출판사에서 출판되지 않으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좋은 시인이라고 내세우는 최영미와 신현림을 비판했다가 젊은 남성 비평가로부터 건방진 ‘여류시인’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남류 ‘비평가’의 암묵적인 견해에 따르면, 위대한 창작과비평이 인정한 시인들의 문학성에 어떻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여자가!”(‘조선일보를 위한 문학’) 김정란과는 다른 관점에서 나는 창비 진영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하고 싶다.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거대담론에 대한 선호도 좋지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구체적 모순에 집중해 달라는 것이다. 문학권력이나 문언유착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를 게시판상에서의 간략한 논의로 끝낼 게 아니라, 본격적인 담론의 형태로 제기해 볼 수는 없느냐 이 말이다. 현실의 구체성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대담론은 진보적 이념을 자기변호의 수단으로 삼는 특이한 형태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이와 함께 창비 내부의 의사소통 체계를 좀더 민주적이며 수평적인 체계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나 같은 외부의 사람이 보기에 창비는 지나치게 백낙청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창비는 젊은 문학인들에 의한 내부비판이 활성화될 수 있는 문학적 통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창비의 경우는 뒤늦게라도 자기성찰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지만, 문지의 경우는 아예 문제의식 자체가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느낌을 갖게 한다. 나는 문지가 지금 매우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문제점은 문지쪽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았던 ‘열린 정신’과 ‘문학적 다원주의’가 공허한 수사로 전락되는 사태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와 함께 문지가 주장하는 열린 정신과 문학적 다원주의는, 90년대의 문학권력으로 급부상한 문학동네 역시 공히 표명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변화된 현실에 걸맞은 이념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차원에서 나는 <문학과 지성>에서 <문학과 사회>로의 변화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과 지성>이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항하여 개인주의와 시민의식을 옹호한 것은 당대적 차원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차제에 우리 문학의 토대 점검을
그러나 문제는 <문학과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이념에 대한 충분한 심화와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인적 세대교체는 이루어졌지만, 정신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세대교체로서의 ‘내적 필연성’이 없는 인맥의 결집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나는 문지가 이른바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극우언론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았으면 한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싶다. 리버럴리스트가 극우언론에 봉사하는 일은 매우 민망한 모습이다. 더군다나, 정과리가 누군가. 문지의 대표적인 평론가가 아닌가. 적어도 지식사회에서 <조선일보>에 대한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을 맡는 등의 행동을 자제했어야 옳았다. ‘문언유착’이나 ‘문학권력’, ‘섹트주의’와 같은 문제틀들은 문학의 자율적 체계와 함께 시스템의 문제까지 고려해 보자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문학담론의 발생적 토대에 대한 탐구도 문학비평이 탐구해야될 주요한 영역이다. 흔히 이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명원/ 문학평론가raca@sidae.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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