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금융기관 도산을 막아라

(사진/원화와 외화부족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넘기고 있는 일부 종금사들은 처방을 더이상 늦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처해 있다.)

“50조원의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해결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재정경제원의 한 간부는 잘라 말한다. 외환시장 개입, 자본유입 확대 등 의 조처는 현 금융·외환시장의 불안을 완화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은 될지 언정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이미 발생한 금융부실 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 골드먼삭스의 김선배 박사(경제분석부장)도 지난 11월12일 한국금융학회 추계 심포지엄 에서 “금융기관 부실문제를 투명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 했다.


은행이 문을 닫는다면…

한국 금융·외환시장의 불안, 금융시스템의 위기는 바로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막대한 금융부실로 인해 금융기관의 대외신인도 가 떨어지면서 해외차입이 어려워졌고 이는 바로 달러부족→환율폭등→외 국인투자자 이탈→주가폭락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금융기관의 부실 을 결정적으로 키운 것은 한보로부터 시작된 대기업들의 연쇄부도. 삼미 특수강,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태일정밀, 해태, 뉴코아 등 올 들어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나 화의를 신청한 대기업들은 이름만 열 거하는 데도 숨이 찰 지경이다.

관건은 50조에 이르는 막대한 금융부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 그 핵심은 부실채권을 누가 부담할 것이냐로 귀착된다. “이미 발생한 부 실은 누군가 반드시 부담해야 한다. 아무리 회피하려고 해도 헛수고일 뿐 이다. 남은 문제는 누가 부담하느냐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 관계자는 딴 방법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시장경제원리에 충실한 부실금융기관 처리는 당사자인 금융기관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맡기는 것이다. 금융기관이 자구노력에 성공하면 정상화되 는 것이고 실패하면 합병이나 청산의 길을 밟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는 얼마전까지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정부가 앞장서 추진한다는 인상을 주는 일은 꺼려했다.

그러나 기아 이후 계속 이어진 대기업의 연쇄부도는 정부가 더이상 팔장 을 끼고 있을 수 없는 지경으로 사태를 몰고 갔다. 금융기관 스스로 구조 조정을 하도록 기다려줄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당장 원화와 외화부 족으로 하루 하루를 힙겹게 넘기고 있는 일부 종금사들은 처방을 더이상 늦추기 어려운 극한상황에 처해 있다. 은행권은 사정이 다소 낫다고는 하 지만 올 연말에는 상당수 은행의 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비율이 국제결제 은행(BSI)에서 제시한 최저선인 8%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 이다. 위험자산은 늘어났는데 부실채권으로 수지가 악화돼 자기자본 규모 가 줄어들면 자기자본비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 6월 말 현재 자기자본비율이 8%대에 머물고 있는 제일 등 8개 은행과 대규모로 부실채 권이 늘어난 서울은행이 위험하다.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8% 밑으로 떨 어지면 당장 신용평가등급이 떨어지게 되고, 이는 바로 해외차입을 불가 능하게 만들게 된다. 가뜩이나 달러부족으로 금융기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은행의 해외차입이 원천적으로 막히는 것은 금융계 전체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또 현 시점에서 종금사 한곳이라도 지급불 능 사태를 맞을 경우 예금자들의 피해는 물론, 금융기관의 연쇄도산이라 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위험도 있다. 재경원의 김준일 자문관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체의 심장에 비교할 수 있는 금융기관의 도산은 일반기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유증이 크다”고 말했다.


턱없이 부족한 부실채권 정리기금

(사진/외환시장 불안 등은 바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

정부가 금융개혁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대로 종금사에 대해 부실화 정 도에 따라 경영개선 명령, 증자 권고, 영업일부 정지, 인수합병 권고 등 을 취하는 ‘조기시정장치’ 도입과 부실채권 정리기금 확대를 포함한 금 융시장 추가 안정대책을 내놓기로 한 것도 이런 심각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재경원 금융정책실 관계자는 “현재 종금사의 부실화 정도를 평 가하는 기준설정 작업을 벌이고 있다”면서 “일부 상황이 안좋은 종금사 에 대해서는 바로 인수합병 등 최후통첩이 내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다”고 말했다.

정부가 부실채권 정리기금 규모를 5조원 이상으로 대폭 늘리려는 것은 기 금 규모가 너무 적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부는 이미 지난 10월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성업공사에 총 3조5천억원 규모의 부실채권 정리기 금 조성방안을 내놓았다. 부실채권 정리기금을 통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부 실채권의 담보물을 경매시 평균 낙착률 수준(감정가의 67%선)에서 매입해 준다는 것이다. 3조5천억원의 기금은 정부의 현물출자와 한은의 융자, 금 융기관의 출연, 성업공사의 채권발행 등 짜깁기 방식으로 조성된다. 그러 나 이는 무엇보다 기금 규모가 현재 금융권이 안고 있는 부실채권에 비해 턱없이 적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한은의 채권인수는 통화증발을 불러와 바로 물가상승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부실채권 누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금융권에 대해 출연토록 한 것도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식이라 는 지적도 있다.

금융권은 물론 정부 안에서 조차 부실채권을 근본적으로 털어내기 위해서 는 기금을 더욱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성업공사가 5조원의 기 금으로 매입할 수 있는 부실채권은 7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총부실 채권 규모 50조원과 비교하면 15%에 불과한 것이다. 성업공사가 인수한 부실자산을 시장에 내다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다시 2차, 3차로 부실채권 을 인수하면 정리규모는 더 늘어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지 배적이다. 한 예로 우리가 모델로 삼은 일본의 부실채권정리기구 경우 금 융기관으로 사들인 15조엔어치의 부실채권 가운데 지난 7년간 팔린 것은 1조엔에 불과한 실정이다. 부동산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매각을 촉진하 기 위해 부동산을 싼값에 내놓을 수도 있지만 이는 바로 성업공사의 손실 로 이어진다. 국책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부실채권 문제는 30∼40년간 관치경제에서 쌓여온 고름이 한꺼번에 곪아 터져 나온 것”이라면서 “시 장의 조속한 안정을 위해서는 부실채권 문제를 늦어도 2∼3년 안에 완전 히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정부재정 투입 규모를 10조원, 15조원까지 획기 적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수합병 유도, 안 되면 파산

부실채권 인수는 정부의 금융기관 주식 인수를 고리로 금융기관의 인수합 병 등 구조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성업공사에 부 실채권의 담보물을 넘긴 금융기관이 감정가의 33%를 결손처리하면서 자기 자본비율이 8%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익이 많이 나는 은행의 경우 결 손처리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올해 은행들의 수지는 최악의 상황이다. 은감원의 김순배 경영관리과장은 “올 상반기중 25개 일반은행 가운데 10개가 적자를 기록했지만 하반기에는 경영사정이 더 안 좋다”고 말했다. 은행의 주가가 액면가를 밑돌고 있어 증자가 불가능한 상황인 만 큼 이들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결국 정부가 주식을 매입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가 주식을 인수한 금융기관은 사실상 국책은행의 성격을 갖게 되고 그 운명에 정부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6 천억원의 현물출자를 하면서 지분율 49%의 최대주주가 된 제일은행은 사 실상 국책은행이 됐다. 우리보다 앞서 금융위기를 겪은 외국의 경우 정부 가 지분을 인수한 금융기관의 인수합병이 손쉽게 이루어진 사례로 볼 때 이들은 향후 금융기관 구조조정에서 태풍의 눈이 될 공산이 크다.

정부가 예금보호법 개정을 통해 기능을 대폭 강화한 통합예금보험공사 내 예금보험기금도 부실채권정리기금과 함께 부실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촉진 할 쌍두마차 구실을 하게 될 전망이다. 정부는 회생 가능한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부실채권정리기금을 활용해 부실채권을 적극 인수해주는 대신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부실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예금보험기금이 직접 교 통정리에 나설 계획이다. 예를 들어 국제결제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밑도 는 은행에 대해서는 그 정도에 따라 경영지도, 경영진 교체, 합병 권유, 영업권 퇴소, 강제퇴출 등의 조처를 취하는 방안을 마련중이다. 부실금융 기관은 일단 인수합병을 유도하되, 안 되면 파산시키겠다는 것이다. 예금 보험기금은 인수합병을 활성화하기 위해 부실금융기관을 인수하는 금융기 관에 대해 자금을 지원해 주게 된다. 정부는 이를 위해 예금보험기금의 규모를 대폭 늘릴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 현재의 기금 규모는 7천4백억 원에 불과해 금융기관의 인수합병을 지원하는 데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기금의 새로운 재원은 기존의 보험료 수입과 함께 정부보유 주식, 채권, 부동산 등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출연해 마련하게 된다. 부실채권정리기금 과 함께 정부재정이 부실금융기관 정리를 촉진하기 위해 직접 동원되는 것이다.

(사진/국회 재경위에 출석한 강경식 부총리. 그의 경제위기 관리능력에 대해선 회의적인 평가들이 많다. )

재경원 관계자는 “정부가 망할 소지가 있는 부실금융기관은 새 주인을 찾아주거나 사정이 괜찮은 다른 은행에 합칠 수 있는 제도적인 수 단이 생겼다”면서 “앞으로 예금보험기금과 부실채권정리기금이 98년말 본격적인 금융산업 개방에 대비해 빅뱅식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원 ‘대규모 재정투입’에 난색

문제는 이처럼 들어갈 곳이 많은 정부재정을 어떻게 조달하느냐로 모아진 다. 특히 부실채권을 인수하는 데 당장 실탄을 필요로 하는 부실채권정리 기금 조달이 열쇠다. KDI의 한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물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부실채권 정리기금을 대폭 확대하는 것은 국가재정을 동원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정자금 투입에 대해서는 재경원 의 예산실부터 반대가 심하다. 대규모 재정자금 투입은 재정적자를 초래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에 쓸 예산을 전용하는 방법도 있지 만 경직적인 우리 예산구조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당면한 금융위기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이외에는 방도가 없다는 지적이 많다. 재경원의 한 간부는 “예산실 담당자들은 재임중에 재정적자를 수용했다는 ‘오명’을 남기지 않겠다는 이기주의적 발상을 버려야 한다”면서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들이 80년대 말 금융부실로 인한 금융위기를 대규모 재정자금 투입 방식으로 해결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간부 는 “강경식 부총리가 기아사태나 외환위기의 처리시점을 늦추다가 사태 를 더욱 어렵게 만든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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