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추적

이지메 당하는 금융실명제

(사진/"속마음은 `폐지'." 11월13일 금융실명제 전격유보를 건의한 전경련 회장단.)

“금융실명제는 공정하고 밝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현해 야 한다.”

지난 93년 8월12일 오후 7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황인성 국무총 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금 융실명제 전격실시를 결정하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즉각 이렇게 화답했다.


저축률 하락이 실명제 탓?

그로부터 4년2개월이 흐른 뒤인 지난 11월13일. 전경련은 최종현 회장 주 재로 회장단회의를 열고 정부당국에 금융실명제를 전면유보해 달라며 사 실상의 폐지를 건의했다. “최근 우리 경제는 60년대 이래 최악의 위기상 황에 처해 있다.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이 살 수 있는 대책 이 세워져야 한다. 이에 정부당국에 대해 금융실명제 유보를 건의하고자 한다.”

불똥은 즉각 정치권과 정부로 튀었다. 정치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폭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신한국당, 국민회의, 국민신 당의 대선후보들은 토론회 등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보완 필요성을 제기했 다. 누구에게서도 재계의 요구를 반박하거나 비난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당황한 것은 정부. 재정경제원은 14일 ‘전경련의 금융실명제 전면유보 주장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라는 반박문을 통해 “금융실명제는 지난 4 년간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치르면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고 이제 정착단계에 있다”며 “투명한 금융거래 질서확립을 목표로 한 금융 실명제를 전면유보하자는 것은 과거 금융암흑시대로 복귀하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청와대도 거들고 나섰다. 김인호 청 와대 경제수석은 15일 기자들과 만나 “지하자금을 산업자금화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유보하자는 전경련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허구”라고 잘라 말했다.

전경련은 우리나라 경제의 간판격인 30대 그룹 회장들이 실질적으로 이끌 어가는 재계의 총본산. 이런 전경련이 대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는 시점에 서 갑자기 실명제 전면유보를 들고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 전경련이 내세 운 표면적인 이유는 실명제가 현 경제위기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손병두 상근부회장은 지난 13일 이런 주장의 근거로 민간저축률의 급격한 하락과 민간소비의 증가를 꼽았다. 92년 27.1%였던 민간저축률은 실명제 실시 이 후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여 지난해에는 23.7%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민 간저축률의 하락을 실명제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실 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도 87년 32%로 최고치를 보인 이후 지속적으로 하 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부문과 정부부문을 합한 총저축률은 실명제 실시 이후 지난 95년까지는 오히려 증가하기까지 했다. 96년에 민간저축 률이 급속히 떨어진 것은 실명제 영향이라기보다는 95년 말부터 본격화된 경기침체 탓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안방 장롱·금고의 돈이 문제다

(사진/93년 8월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명령이 있은 뒤 이경식 부총리가 구체적 실시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실명제가 과소비를 조장하고 경상적자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주장도 설득 력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실명제 실시 이후 박쥐처럼 햇빛을 싫어하 는 검은돈들이 생산부문에 투입되기보다는 소비쪽으로 흘러들어 과소비를 유발시킨다는 주장은 심심찮게 제기됐다. 일부 부유층들의 과소비 행태가 사회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소비 추세를 보여주는 내수용소비재출하 증가율은 실명제가 실시된 93년 3.9%에서 94 년에는 9.3%로 뛰어오르더니 이후에는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 올해(1∼9월 )는 4%까지 떨어졌다. 한마디로 전체 경기상황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의 경우 해외여행경비 급증 등으로 인한 무역외수 지 적자 확대가 큰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무역외수지는 92년 26억달러에서 93, 94년에는 오히려 19억달러 수준으로 줄었다. 여행수지 적자 확대는 소득증가와 함께 국민들의 소비심리가 고급화된 데 따른 것 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실명제 실시로 40조원 가까운 지하자금이 숨어버려 자금순환의 맥을 끊어 놓고 있다는 주장도 곱씹어 볼 대목이다. 전경련은 이들 지하자금이 산업 자금으로 쓰이지 않고 사장돼 경제난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주장이다. 그 러나 지하자금 중에서 산업자금으로 활용할 부분이 어떤 돈인지가 분명하 지 않다. 예를 들어 가명 또는 합의차명예금과 무기명채권에 투자된 돈이 라 하더라도 금융실명제의 틀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이미 제도권 금 융기관 안에 들어와 있는 부문이다. 일단 금융기관에 들어온 돈은 그 성 격과 관계없이 산업자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채시장에서 돌아다 니고 있는 돈도 어음할인 등을 통해 기업자금으로 활용되고 있어 경제활 동에 이용되기는 마찬가지다. 실명제 이후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자금을 사용하라는 제의가 기업체에 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 는 돈의 조성경위와 주인이 누구냐는 것과는 관계없이 괴자금조차도 궁극 적으로는 산업활동에 이용될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다.

결국 순수하게 안방 장롱이나 금고, 땅 속에 잠들어 있는 돈이 문제인 셈 이다. 따라서 지하자금 양성화를 논의하려면 이처럼 사장된 현금의 규모 와 그 양성화 가능성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 에서 사장된 돈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규모도 그리 많지 않 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기우로 끝났던 실명제 반대 논거

재계는 이런 돈의 규모 파악이나 양성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전경련의 손병두 상근부회장은 지난 13일 경제 일각에서 검은돈의 양성화 와 관련해 거론되고 있는 무기명 장기채권에 대해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물론 그 이유를 신한국당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 자금 폭로사태에서 나타났듯이 국가권력이 앞장서 예금주의 비밀보장 원 칙을 훼손되는 풍토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으로는 새롭게 양성화될 지하자금이 특별히 없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15일 “실명제를 유보하거나 무 기명 장기채를 발행한다고 해서 새롭게 산업자금화될 돈이 재계의 주장처 럼 큰 것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따라서 정부가 무기명 장기채 발행 에 반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실명제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한편 도리어 변칙적인 증여·상속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위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금융실명제 실시 이전에 이를 반대하던 논거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거 액의 큰손 이탈로 인한 증권시장 침체 △금융권에서 이탈한 자금이 부동 산시장으로 몰려 투기 재연 △해외로의 자금유출 △금융소득종합과세로 인한 저축률 저하 △사채거래 위축에 따른 중소기업의 어려움 가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대부분 기우로 끝났다. 증시는 일시적 으로 영향을 받았으나 즉각 회복됐고 부동산시장으로의 자금 유입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사채시장이 상대적으로 위축돼 제도금융권과의 보 완기능이 다소 약화된 점은 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다.

실명전환 등도 애초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돼 올 6월 말 기준으로 실명 예금의 실명확인율이 99.4%, 비실명예금의 실명전환율이 98.8%에 이르고 있다. 실명제 실시 당시 금융권에 들어가 있던 실명, 비실명예금 4백8조 여원 가운데 아직까지 실명확인이나 전환 절차를 거치지 않은 돈은 2조6 천여억원에 불과하다. 또 그 대부분은 실명확인이 사실상 필요없는 휴면 성계좌나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저축성예금이라는 것이 금융당국의 설명 이다. 조세연구원의 정영헌 전문연구위원은 “실명제는 조세형평성 제고 와 함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건전한 정치풍토 조성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강경식 부총리가 길 터준 셈

사정이 이런데도 재계가 경제난의 원인을 실명제에 돌리는 것은 기본적으 로 자산계층의 실명제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실명제는 일반 서민에게는 사소한 불편한 절 차에 불과하지만 정치자금이나 비자금 등 검은돈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는 자금운용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말한다.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하는 금융실명제 아래서도 합의차명의 형태로 전주를 숨길 수 있 지만 거래규모가 수십억 단위를 넘을 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름을 빌 려준 사람이 딴마음을 먹으면 언제든지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정부가 실명제의 완결판으로 시행에 들어간 금융소득종합과세도 자산계층에게는 목의 가시 같은 존재다. “세금을 덜 내고 더 내고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사안이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 한다. 기업들도 불가피하게 비자금을 조성해야 할 때가 많다. 실명제는 비자금조성이나 사용에 여러모로 제약을 가한다.” 대기업 한 임원의 설 명이다. 기업으로부터 부정한 돈을 받은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이를 편하 게 쓸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실명제인 것이다.

사실 전경련이 지난 93년 정부의 실명제 실시에 박수를 친 것을 액면 그 대로 실명제에 찬성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전경련이 실 명제 찬성 입장을 공식적으로 확정한 것은 92년 9월. 그 이전까지는 시기 상조론, 단계적 실시론을 제시하며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해 왔다. 전경련 이 당시 갑자기 실명제 찬성으로 돌아선 배경에 대해서는 정부가 준비 부 족 등으로 당분간 실명제를 실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재계가 대 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정치자금 공세를 차단하는 한편 실명제 거부 세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겠다는 계산 아래에 ‘겉 다르고 속 다른’ 결정을 내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번 실명제 유보 파문에는 정부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지난 3월 부임 직후 독단적으로 실명제 보완론을 제기해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강경식 경제팀은 중소기업 에 대한 창업출자 및 증자자금 등에는 도강세(渡江稅)를 물리는 대신 자 금출처조사를 면제해주고 소득세 최고세율(40%)을 내면 금융소득 분리과 세 인정과 금융소득자료 국세청 통보를 면제해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금 융실명제 대체입법을 국회에 제출해 실명제 보완론에 사실상 길을 터주는 우를 범했다.


치고 빠지는 전경련

전경련은 이번에 실명제 유보론이 사회적으로 예민한 반응을 일으키자 즉 각 무마작전에 나섰다. 손병두 상근부회장은 14일 오후 김인호 청와대 경 제수석을 직접 방문해 실명제 폐지가 아니라 일시적 유보를 요구했다는 것과 국가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것은 아님을 설명했다. 전경련의 한 임원도 “현 경제난의 근본원인은 모두가 지적하듯이 고비용 저효율 구조 탓이지만 실명제도 여러 요인 중의 하나라는 뜻”이라며 “실명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금에 대한 철저한 비밀보장 등 주변여건이 성숙 될 때까지 일시 유보하자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보였 다. 그러나 이런 전경련의 태도는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어차피 이 정권 아래서 실명제 유보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마 당에 다음 정권에서 대통령이 될 여야 세 후보진영 모두가 실명제 보완을 천명하고 나선 만큼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 일부에서는 이번 전경련 회장단의 실명제 유보 요구 결정이 즉흥적으로 내려졌다는 얘기도 있지만 전경련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 려졌다. 전경련의 한 간부는 “13일 회장단회의에는 상당수 그룹 회장들 이 불참했지만 실무진들이 사전에 각 그룹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는 등 의견수렴을 거쳤다”고 말했다. 82년 이철희 장영자씨 부부 어음사기사건 을 계기로 처음으로 논의 대상에 올랐다가 재계 등의 반대에 밀려 11년 뒤인 93년에야 햇빛을 보았던 실명제가 새 정부 아래서 제모습을 잃지 않 고 살아남을지 주목된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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