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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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추적당한 통장.' 국민회의는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 사건이 드러난 뒤 실명제를 대폭 보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정치권과 각당 대통령 후보들이 금융실명제를 대폭 손질하는 내용의 공약 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면서 현정부 최대의 개혁성과로 평가받는 실명제가 실종될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 93년 8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전격 시행 된 지 불과 4년 만이다. 공약화 작업은 지난 11월1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가 실명제를 현 “경제난의 궁극적 원인”으로 지목하고 전면유보를 주장 한 뒤 여야 정치권이 서둘러 “보완책 마련”을 합창하면서 빠르게 진행 되고 있다. 여야 대권후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전경련의 주장을 반박하 지 않았다. 오히려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눈치를 살펴가며 “대폭 보 완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폐지나 다름없는 손질이 이뤄질 가능성마저 점 쳐지고 있다.
“정치자금 마련에 거추장스럽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는 지난 14일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전경련의 주장 에 나도 상당 부분 공감한다”고 맞장구쳤다. 그는 “실명제가 과거 징벌 적인 차원에서 활용된 측면이 있으므로 현행 긴급명령제를 폐지하고 조세 법에 흡수해야 한다”며 “무기명 장기채권도 좋은 방법”이라고 구체적 손질 방안을 제시했다.
이 총재는 그동안 “실명제는 조세 형평과 밝은 사회건설을 위해 필요한 개혁조처로 그 근본취지가 손상됨이 없이 정착돼야 한다”고 말해왔다. 김 대통령과 결별을 선언한 뒤에도 “실명제 등 현 정부의 기본정책을 변 화시킬 계획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해왔다. 하지만 재계의 요구에 화답 해 이제 “획기적 보완”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튼 것이다. 현재 신한국당 은 이 총재가 제시한 무기명 장기채권 발행이나,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하 는 기명채권발행을 통해 지하자금 양성화를 유도한다는 쪽으로 보완의 큰 틀을 마련해 놓은 상태다. 또 30만원인 현행 실명거래 예외 한도액을 대 폭 상향조정하고 산업자금화된 지하자금에 대해서는 출처조사를 한시적으 로 면제하는 방안도 집중 검토하고 있다. 다만 현재 4천만원인 금융소득 종합과세 최저한도액의 인상여부, 증시에 투입되는 지하자금에 대한 출처 조사 면제 여부 등에 대해서는 광범한 여론을 수렴한 뒤 결정한다는 태도 를 보이고 있다.
신한국당의 선회는 정치 현실을 나름대로 인정한 결과라는 게 정치권의 평가다. 그동안 신한국당은 ‘돈 안 드는 선거’를 소리높여 외쳤다. 하 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거액의 돈이 필요하다는 하부조직의 아우성을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명제 보완 움직임은 돈줄을 쥐고 있는 재 계의 비위를 맞추는 몸짓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신한국당 등 정치권이 실명제가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판단해온 상황 에서 재계의 실명제 유보 주장은 “가려운 다리를 때마침 긁어준 것”이 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 여야 정치권은 정부가 실명제를 법제화하기 위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안)’과 이 법안에 따른 실명제 후퇴를 보완하는 ‘자금세탁방지법(안)’을 국회에 넘긴 뒤 두 법안의 처 리를 차일피일 미뤄왔다. 자금세탁방지법은 의원들의 이견을 이유로 제대 로 논의조차 못했고 일부 의원들은 실명거래법(안)만 통과시키려는 속셈 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신한국당은 현재 진행중인 공약화 작업은 실명 제 유보가 아닌 보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윤원중 총재비서실부실 장은 “우리 당론은 유보나 폐지가 아니라 대폭보완”이라고 말했다. 당 직자들도 갑작스런 변화가 개혁의지의 퇴색이라는 비난여론을 불러와 이 총재의 지지율 상승 분위기를 꺾는 악수가 될 것을 우려하는 조심스런 분 위기다.
DJP, 보완+폐지=대체입법?
하지만 당 한쪽에서는 아예 유보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종호 의 원(충북·괴산) 등 대전 충남·북지구당 위원장 24명은 14일 여의도 63빌 딩에서 회동을 갖고 “지하자금의 유입을 통해 중소기업과 영세상인 등의 활로를 터주기 위해 실명제를 유보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전경련의 주장 을 전폭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이들은 이 결정을 당에 공식 건의하겠다는 자세여서 앞으로 논란이 예상된다.
국민회의도 재계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 명제 완화에 반대한다는 게 그동안 국민회의의 당론이었다. 하지만 지난 15일 자민련과 정책협의회를 갖고 긴급명령을 대체하는 입법을 추진한다 는 원칙에 합의했다. 김원길 정책위의장도 “골간은 유지하되 금융거래 비밀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중”이라고 밝혔다. 정치권 에서는 국민회의가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 사건이 드러난 뒤 대폭 보완하 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최소한 금융거래의 비밀을 보장하는 등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는데 때마침 전경련의 유보요구 는 대체입법 추진에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물론 자민련과의 정책공조 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자민련은 국민회의와는 반대로 그동안 실명제 폐지라는 당론을 고집해 왔다. 김종필 총재는 “폐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왔고 ‘실명제 폐지 건의안’을 소속의원 전체 이름으 로 제출한 상태였다. 하지만 ‘DJP 단일화’ 성사 뒤 국민회의와의 정책 협의 과정에서 대체입법쪽으로 한발 물러섬으로써 국민회의쪽도 뭔가 양 보가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일단 국민회의는 자민련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절 충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자금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 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대중 총재도 최근 “돈은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돌아다닌다. 돈이 돌 수 있는 실명제가 돼야 한다”고 이를 뒷바침했다.
국민회의가 마련중인 대체입법안은 변칙증여를 막는 장치가 마련된 낮은 이자(5∼7% 정도)의 무기명장기채권 발행을 통해 지하자금을 산업자금으 로 끌어들이는 내용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와 함께 현존하는 차명계좌 를 완전히 허용하기로 했다. 차명계좌를 점차 줄여야 한다는 그동안의 주 장에서 완전히 후퇴한 것이다. 돈의 과거를 추적하는 처벌조항을 삭제하 고 장기저리 산업채권 발행도 검토하고 있다. 또 금융시장 경색의 걸림돌 로 인식되고 있는 금융소득 종합과세는 과세대상 최저선을 현행 4천만원 에서 상향 조정해 대상자를 대폭 축소할 뿐 아니라 세율도 크게 낮추기로 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3천만원 이상 금융거래 때 국세청에 통보하 기로 한 조항도 없애기로 했다.
이인제는 ‘이회창 집중성토’ 계기로
이런 대체입법 내용에 대해 당 안에서조차 금융실명제라는 이름만 유지했 을 뿐 사실상 실명제 폐지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국민회의 의 한 초선의원은 “실명제를 강화해 차명거래도 불법으로 해야 할 마당 에 이를 폐지하려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또다른 한 당직 자는 “이미 실명화한 뒤 자금출처를 조사받아 세금이 부과된 사람과의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회의 소속 초선의원 16명의 모임인 ‘21세기 푸른정치모임’도 “한국경제의 위기는 실명제가 아니라 재벌의 덩치불리기식 경영에 있다”며 비판하고 나서 당의 움직임과는 다 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민신당은 일단 실명제 논란을 최근 지지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이회창 총재에 대한 견제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인제 후보는 15일 기 자간담회를 자청해 “금융실명제가 무력화된 것은 금융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국민들의 믿음 때문”이라며 “DJ비자금 자료를 내놓고 폭로한 이회창 후보가 금융실명제를 파괴한 장본인”이라고 집중 성토했다.
이런 이회창 때리기와 별도로 국민신당쪽은 무기명장기채권 등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받을 수 있는 보완책 마련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국민신당은 이 무기명장기채권을 통해 기업안정기금을 조성해 자금난을 겪는 기업이 나 창업자들을 지원하는 등 위축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닥 을 잡고 있다. 이 후보는 이와 관련 “자금의 출처를 묻지 않는 기업안정 화 자금을 한시적 채권으로 조성, 자금의 물꼬를 트겠다”고 밝히고 있다 .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후보로 낸 ‘국민승리21’만이 금융실명제를 손질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에 명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양심오 부대변인은 “재벌이 문어발식 덩치불리기를 계속하며 구조조정 시기를 놓친 결과로 생겨난 위기를 실명제 때문이라고 우기는 것은 자기중심적 해석”이라고 비판하며 “실명제의 운영상 나타난 문제점은 선거가 끝난 뒤 심도있는 논의를 통해 개선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여야 대권주자 의 참모들은 한결같이 “대선과정에서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과 함께 대체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선거 뒤 실명제의 훼손은 불가피할 것같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