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

“정권말, 한몫 단단히 챙겨라”

(사진/최근 신도시 개발지구로 지정된 파주지역 교하지구. 무려 4백10명의 공무원과 그 가족이 아파트 및 토지를 미리 사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람들요. 일 하러 오는지 돈 챙기러 오는지 모르겠어요. 아침에 출 근해 잠깐 얼굴 비춘 뒤 어디론지 나가서 오후에나 돌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일 안 한다는 것은 알지만 챙기기만 하는 것 같아 착잡해요.” 기초자치단체에 배정된 한 공익요원이 전하는 말이다.

대선을 앞두고 공직자들이 위 아래를 막론하고 총체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 최고 권부인 청와대는 임기말 현상에다 집권당의 실종으로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비틀거리고 있다. 정부 부처는 물론 말단 자치단체에 이르기 까지 각급 공직사회도 임기말 권력누수에 따른 부정비리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공직사회의 이런 총체적 혼란상을 ‘말기적 현상’이라고까지 말한다. 20세기의 온갖 부패와 찌꺼기들이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방향감각 잃었으니…

청와대는 통제소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상실하고 있다. 야당후보의 당선 이 유력해지고 있는 데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중플레이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등 중립성 시비에 걸려들면서 가뜩이나 흔들리는 통제기능을 완벽하 게 잃어버린 것이다.

청와대의 방향감각 상실은 바로 행정부처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무정부적 방임으로 이어진다. 공직사회가 급속히 자체 감사기능이나 정화기능을 잃 게 되는 것이다. 자체 정화기능의 상실은 부패의 싹을 키우게 마련이다. 권력누수 시기와 함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한건 챙기자’는 유혹에 공직사회가 넘어가고 있다. 대선이 끝날 때까지 일손을 놓고 정치 권 상황만을 쳐다보는 무사안일과 정치권의 줄서기도 마찬가지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공직자의 부정. 여기에는 고위직과 하위직이 따로 없다. 다만 청와대나 감사원, 총리실, 자체 감사기구의 감사나 감찰활동 에서 고위직은 잘 걸리지 않을 뿐이다.

권력누수 기간을 이용한 대표적인 공무원 부정사례로는 최근 정부의 한 사정기관에 적발된 한 광역자치단체 공무원의 뇌물수수사례이다. 중하위 직의 이 공무원은 최근 업자로부터 1억원을 받은 사실이 적발됐다. 이 사 정기관은 현재 그의 추가 비리를 조사한 뒤 조만간 그 진상을 발표할 것 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적발된 비리는 중하위직 공무원이 한번에 받은 액 수치고는 이례적으로 크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 원래 임기말에는 뇌물액수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며 “평소보다 큰 것을 봐주기 때문에 뇌물액수도 커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인사이동으로 현재의 이권부서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대선 전에 이권을 챙기려는 업자들의 유혹에 공직자들의 눈이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 다.


서울시장 교체, ㅅ그룹 살판났다?

(사진/"또 떼어먹힐라." 마포구청 자동차등록세 횡령사건은 공무원들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됐다. )

최근 국내 굴지의 ㅅ그룹이 강남구 도곡동에 지으려는 서울시내 최고층 빌딩의 건축허가 여부를 둘러싸고도 서울시청 주변에는 온갖 의혹들이 제 기되고 있다. 이 그룹이 관련 고위직 공무원들을 상대로 엄청난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그룹은 그동안 도곡동에 102층 빌딩을 짓기 위 한 건축허가를 받으려고 애써왔으나 서울시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민선시장 체제의 서울시가 주변 주민들의 반대와 교통량 문제, 수도권 인 구집중 등을 내세워 반대했던 것이다. 이 그룹도 조 시장 때는 이 사업이 사실상 물건너간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조 시장이 대선에 출마하기 위 해 시장직을 버리고 강덕기 행정부시장이 시장대행을 맡으면서 상황이 바 뀌기 시작했다. 강 부시장이 애초 서울시의 방침을 바꿔 삼성그룹에 건축 허가를 내주려 한다는 이야기들이 시청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에 따르면 ㅅ그룹은 강 시장대행체제가 들어서면서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다음 정권에서 새로운 민선 시장이 등장하면 주민들의 민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선출직 시장의 입장 때문에 허가를 받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실상 ‘관선시장’ 체제에 서 허가를 받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잇따라 터진 서울 마포구청 차량등록대행업체 직원의 등록세 횡령사 건과 경기도 파주지역의 공무원 투기행위 등도 임기말 공무원 부정비리의 한 전형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서울 마포구청 차량등록 대행업체 직원 정영환(33)씨가 가로챈 자동차 등록세 액수는 3억7천3백만 원에 이른다. 그 액수는 검찰수사가 진척됨에 따라 더 늘어날 것으로 보 인다. 물론 아직까지 마포구청 공무원들의 직접적인 관련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검찰은 현재 구청쪽이 납세자들의 등록세가 은행에 지연 입금 되는 관행을 알고도 묵인했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중이다. 이번 마포 등록 세 횡령사건은 공무원의 관련여부와 상관없이 구청의 관리감독 소홀책임 은 면할 수가 없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사실상 공무 원들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나사풀린 구청 공무원들의 안 이한 자세 때문에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세도(稅盜)사건”이라고 규정했다 .

경기도 파주지역에 대한 공무원들의 투기행위도 공직사회가 얼마나 부정 비리에 빠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아직 정확한 부정행위와 비리 내용 등 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상당수가 직무상 취득한 기밀을 이용한 것으로 정부기관에서는 보고 있다.


장롱 속에 숨긴 현금 1억3천만원

(사진/94년 11월 구속된 부천시 세금횡령 사건 관련자들. 임기말을 맞아 다시 비슷한 도둑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 )

건설교통부가 최근 신도시 개발지구로 지정된 파주지역에 대한 공무원들 의 투기실태를 조사한 결과 무려 4백10명의 공무원과 그 가족이 아파트 및 토지를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무원과 직계가족의 소속별로는 중 앙행정기관 19명(4.6%), 중앙행정기관의 1차 소속기관인 특별행정기관 53 명(12.9%), 지방자치단체 3백38명(82.5%)이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일 대 67만5천평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되기 전 이곳 땅값이 급등하자 공무원들이 개발정보를 사전에 빼내 투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소 문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일부 공무원들은 파주시내에 주거용 아파트를 분양받는 등 정상적인 거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대부분은 투기목적으로 분석됐다.

정권초기에서는 상상도 못할 공직자들의 부정비리가 임기말 권력누수현상 과 맞물리면서 확산되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임기말 공직사회의 부 정비리 만연 사실은 정부기관의 통계에서 잘 드러난다. 감사원 등 사정기 관과 내무부 등이 올해 9월까지 감사·감찰활동을 통해 적발한 비리공무 원은 1만8천1백35명이나 된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12%가 증가했 다. 이중 1천3백69명은 징계, 나머지는 주의경고 등의 조처를 받았다. 임 기말과 공무원 비리증가의 연관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6급 이하 하위직으로 유형별로는 건축공사와 온천개발, 삼림벌채 등 민원업무 와 관련해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금품을 받았다. 경찰이나 지방자치 단체들에서도 임기말 비리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96년에 마약사범을 가장 많이 체포해 경찰청 선정 ‘전국 마약사범 포도대장’에 선정됐던 경찰관이 마약거래자로부터 뇌물을 받았 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마약사범 포도대장인 부산지방청 형사기동대 장철 호(29) 순경이 부산지역 필로폰 공급조직책으로부터 모두 1천7백50만원을 받은 혐의로 부산지검에 구속됐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경찰관들은 평소에 항상 뇌물의 유혹에 노출돼 있다”며 “임기말에는 아무래도 기강 이 해이해져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고 말했다.

이미 지난 9월 초에는 국도건설사업 입찰업무를 담당하는 4급 공무원 집 에서 1억3천만원의 현금뭉치가 발견돼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설계감리업체 담합입찰 비리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지검 특수부가 원주지방 국토관리청 도로계획과장 공상문(51)씨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공씨 의 안방장롱에서 현금 1억3천만원과 1백만원짜리 수표 20장 등 모두 1억5 천만원이 들어 있는 쇼팽백과 가방들을 발견한 것이다. 공씨는 검찰조사 에서 “1억5천만원 모두 빌린 돈”이라고 부인한 뒤 풀려나자마자 줄행랑 을 쳤다. 검찰은 추가 수사를 통해 공씨 집안에 있던 현금이 대부분 시공 업체 등으로부터 받은 뇌물임을 밝혀냈다. 뇌물수수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현금으로 장롱 속에 그대로 보관해온 것이다. 금융실명제와 공무 원 재산신고제가 실시되면서 뇌물로 받은 현금을 장롱속에 보관하는 새로 운 풍속도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시민안전보다는 돈이 먼저

고위직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구돈회 충북부지사와 방성룡 순천시장, 지연태 전 한국공사 사장, 신정부 서울지하철공사 기술이사 등은 지난 9월 초 관급공사를 맡은 설계감리업 체로부터 각각 1천만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특히 서 울시 건설안전관리본부장이었던 구씨와 지하철공사 기술이사인 신씨는 부 실공사의 표본인 성수대교의 복구공사와 당산철교의 재시공과 관련해 돈 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부실공사를 재시공하 는 과정에서도 뇌물을 받아 또다시 부실시공을 눈감아주는 게 공직자의 현실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뇌물을 받은 업체는 안전시공의 첫 단계인 설계감리였다.

이 밖에 전국의 각 구청과 경찰, 소방, 세무공무원들 가운데 일부가 대도 시의 위생·식품접객업소에 대한 영업허가 및 지도단속 과정에서 업주들 로부터 받는 금품과 향응도 좀더 노골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금 대한 민국은 공직자들의 임기말 ‘한탕’에 뿌리부터 문드러지고 있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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