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

‘책임회피 바이러스’ 감염된 공무원들

(사진/한 지방자치단체 민원실. 최근 임기말이 가까워 오면서 허가 관련 민원도 급증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손을 놓고 있으니 하위직이야 뻔한 것 아닙니까.” 최 근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암행감찰에 나섰던 정부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가 전하는 공직사회의 분위기이다. 한마디로 직급에 상관없이 공무원들이 일상적인 행정 이외에는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고위직은 정권교체 이후 자리보전 걱정 때문에 일이 잡히지 않고, 하위직은 몸사리 기에 바쁘다. “정권말기에는 매맞을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다” 는 무사안일주의가 공직사회에 팽배하다.


정부부처·지방자치단체에 심해

요즘 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 사이에는 민원관련 허가를 미루려는 주무 국장의 기이한 행동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건축관련 주무국장인 이 공무원은 한 건축물에 대한 승인여부 시한이 다가오자 이리저리 핑계 를 대며 자치단체장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국 장은 자기 손으로 승인여부에 대한 사인을 해야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치단체장에 대한 업무보고도 과장을 시켜서 하는 등 단체장과 맞닥뜨리 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해외일정을 핑계로 아예 장기간 자리를 뜨기도 했다. 이 주무국 장이 승인여부에 대한 실무진의 의견을 제대로 올리지 않자 안달이 난 쪽 은 다름아닌 바로 단체장이다. 단체장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무국장과 단체장이 책임을 떠넘기려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공무원은 “임기말에 논란 이 될 사안을 결정할 공무원이 누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중앙부처의 정책결정과정이나 자치단체의 일선행정 현장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다. 최근 위기에 처한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된 배 경에는 관련부처들의 이런 무사안일주의와 보신주의가 일조하고 있다는데 이론이 없다. 기아사태와 관련해서도 재경원 등 관련부처들은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다가 해결의 적기를 놓치고 뒤늦게 처방을 내리는 등 무소신 한 행정자세를 보여줬다. 잘못 개입했다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을 우려해 다음 정권에 해결책을 떠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주가폭락이나 환율 급등 등 금융시장의 혼란에 대해서도 정부부처는 팔장만 끼고 있다가 뒷북을 치기에 바쁘다. 그 사이에 정부 정책의 신뢰는 완전히 실종됐고, 신뢰를 잃은 정책은 표류할 수 밖에 없었다.

일선행정현장에서는 허가를 내줘도 되고 안내줘도 되는 공무원의 재량에 속하는 일을 둘러싼 고의적인 허가지연이 최대의 민원사항이 되고 있다. 감사원에서는 올해들어 허가지연에 대한 민원들의 하소연이 잇따르자 최 근 허가지연사례에 대한 집중적인 감사활동을 벌였다. 감사원은 이 감사 활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70건 이상의 민원지연사례를 적발해 즉시 처리하 도록 조처를 취했다.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책임회피로 나타난다. 이 런 현상은 특히 민원관련 인허가권을 가진 정부부처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정권말기에 구설수에 오를 일을 하지 않으려는 무책임 한 자세와 함께 후임자에게 결정을 떠넘기려는 자기 보신책이다.


세금 안 내는 공무원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법률상 하자가 없는데도 민원을 핑계로 허가를 내주 지 않아 ‘역민원’을 발생시키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에 는 전체 구청에서 허가관련 행정심판이 월 평균 1백건이상 회부되고 있다 . 주로 교통과 건축관련 민원이다.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은 실제 일선 행정현장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고 있 다. 예산을 멋대로 전용하거나 세금납부행정 등에서 구멍이 뚫리고 있다. 내무부 집계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가 올해들어 경상경비를 편법 또는 부 적절하게 사용하다 적발된 사례는 모두 2백45건에 이른다. 특히 지방자치 단체장의 선심성 경비집행액수는 지난해에 비해 87%나 늘어났다. 단체장 들이 내년 지자제 단체장 선거를 겨냥해 예산을 사사로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사정기관과 내무부 등이 감사·감찰활동을 통해 적발한 ‘이탈행정 ’ 사례는 구멍뚤린 행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방 대도 시의 한 구청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새마을지도자 자녀 70명에게 4천8백여 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무자격자를 포함시켜 말썽을 빚었다. 2천cc 이상의 승용차를 보유한 가정의 자녀 19명을 장학금대상자에 포함시키는 등 탁상공론식의 행정을 펼친 것이다. 재정자립도가 10%를 겨우 넘는 한 군에서는 단체장의 치적과 군청업무를 홍보하는 데 무려 1억6천만원이나 사용하기도 했다.

또다른 한 대도시의 구청장은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휴가기간중에도 3백 여만원을 여행경비와 식대 등의 명목으로 받아챙겼다. 전용 승용차를 제 공받으면서 교통비를 꼬박꼬박 챙긴 얌체 시장도 있다. 공복으로서의 자 세를 찾아보기 힘들다. 세금부과과정에서도 각종 허점이 드러났다. 잘못 된 세금부과를 유형별로 보면 과세자료 착오와 세율·과표 잘못 적용, 비 과세대상 부과 등 공무원의 업무착오, 납세의무자 이중납부 및 신고오납 등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공무원의 실수에 의한 것들이다.

공무원들이 세금을 체납하는 사례도 무사안일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최근 서울시의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 공무원중 지방세 체납자가 전체공무원의 11.7%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의 경우 8월말 현재 자동차세 등 지방세를 내지 않은 시 직원은 본청 300명, 자치구 4687명, 산하기관 148 7명, 산하기관 1448명 등 모두 6435명으로 전체 시 직원 5만5100의 11.7% 를 차지하고 있다.

부산지역의 경우에도 녹산공단이 지반침하와 경기불안 때문에 분양도 안 되고 분양가는 계속 내려가고 있지만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민들은 분노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공직자 품위손상사례도 늘고 있다. 내무부가 최근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올해들어 9월말 현재 공무원들의 상습도박과 간통, 성추행 등 품위손상 사례가 지난해보다 41·6% 증가했다는 것이다.

최근 잇따른 서울시내 지하철사고도 공직사회의 무사안일과 기강해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울지하철은 지난 12일에 이어 15일 잇따라 탈선사고가 일어나 출근시간대 시민들이 엄청난 불편을 겪었다. 특히 이번에 일어난 두번의 지하철 탈선사고는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이없는 실무자들의 부주의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고장수리를 위해 군자차량기지로 가던 전동차가 삼성역 구내에서 운전부주의로 탈선한 데 이어 15일 사고는 전 날밤 레일 운반작업을 하던 용역회사 직원들이 공구운반용 수레 1량을 선 로에 방치하고 철수함으로써 발생했다. 지하철 관계자들의 해이한 안전의 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틀이 멀다하고 지하철이 사고를 내 니 이제 진저리가 난다. 도대체 공무원들은 어디에다 신경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울시민들의 불만은 공직자의 무사안일을 겨냥한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