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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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지 시리즈> 3권 고바야시 야스오 외 엮음/오상현 이근우 외 옮김/경당 펴냄)
프랑스의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는 “깨달음은 지식이나 주체를 동요하 게 만드는 강렬한 지진과도 같다”고 말했다. 깨달음은 행동함으로써 도 덕적으로 완성된다. 직관은 창조성의 생명력을 발휘하는 도덕적인 행위의 기본이다. 하지만 직관이 ‘지’(知)의 테두리를 벗어났을 때는 무기력하 다. 품위있는 매력과 상쾌한 웃음으로 ‘지’를 가볍게 채색해야 깨달음 을 얻을 수 있고 행동에 이를 수 있다. 움직임을 모르는 깨달음, 지는 죽 은 언어이고 추함일 뿐이다.
일본 도쿄대학에서 발간한 <지 시리즈> 3권(고바야시 야스오 외 엮음·오 상현 외 옮김, 경당 펴냄)은 지식의 실체를 밝혀내며, 나아갈 방향과 실 천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인식의 방법론을 모색하며 지적 발견의 기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도쿄대학의 각 분야 교수들이 심각한 얼굴로 전문지식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자연과 학, 문화예술 등 거의 모든 학문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그렇게 심각 할 기력이 없다. 다만 인류역사의 걸출한 지적 유산을 텍스트 삼아 일관 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사물을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인식하 는 지의 세계를 순례하는 것이다.
이 시리즈는 학문을 탐구하는 학생들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도록 기획됐 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를 기반으로, 변해가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고 있다. 편집자인 고바야시 야스오 교수는 “대학 개혁의 목적은 경직된 대학제도를 개편하여 국제적·사회적으로 그 지의 삶을 개방하는 데 있다. 그런 개방은 단순히 제도적인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어도 개방된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으 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람이 새로운 제도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밖 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하는 얘기다.
대학이 단순한 전문지식의 전달장소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지의 주체가 기성의 권위를 비판하며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체계 적인 교육프로그램이 없는 대학은 지식전달 장소일 뿐이다. <지 시리즈> 는 학문이 전문지식의 집대성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고 현 장의 여러 관계에 주목하도록 한다. 시리즈 제1권 <지의 기법>은 독선적 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지식에 상호연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학문 현장 에서 어떠한 지의 기법의 이용되는가를 해설하며 학문의 실천적인 재미를 전달하고 있다. 세계를 읽는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언어의 논리(번역·해석·검색·구조)로 인식의 기술·작법을 탐구하고, 마돈나 의 사진집을 텍스트로 욕망의 수사적 기교를 이야기하며 지배이데올로기 의 신화 조작, 이미지 조작을 경계한다.
제2권 <지의 논리>는 인식논리의 창조성을 다루고 있다. 다양한 학문영역 에서 어떤 논리가 발명되고 어떻게 운용되는지, 나아가 각 학문의 현재적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수용소 실상을 서로 다르게 담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쇼아>를 통해 보는 것의 한계를 보는 ‘현 상학’의 한계, 현상 그 자체의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식이다. 고대도 시 폼페이의 거대한 유적에서 검투사의 에로티시즘을 발견하기도 한다. 제3권 <지의 윤리>는 학문적 지가 윤리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피며 지의 책임을 다루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핵병기 사용이 국제 법상의 의무 위반인지에 대해 일본 정부에 자문을 구했을 때 긍정도 부정 도 아닌 어설픈 진술서를 보낸 것은 피폭국이자 국제사회 중심에 선 나라 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주변국들에 배타적인 일본인, 일 본 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준엄한 꾸짖음 속에 공동선에 대한 간절한 바 람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후학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는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 는 통찰력이 있다. 그것은 일본의 저력이기도 하다.
김수병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