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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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일상이 시공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첨단기술 탓이다. ‘속도’가 변화의 핵이다. 그것이 정보통신이든 유전 공학이든, 첨단기술은 시공간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인간 욕망의 표출이자 성과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속도’로 묶인다. 더 빠르게, 더 빠 르게….
‘속도’는 또한 ‘편리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둘은 ‘ 경쟁력’이라는 세기말의 화두에서 하나로 뭉친다.
그점에서 인터넷은 현대문명의 정점이다. ‘속도’와 ‘편리함’을 겸비 한 인터넷은 지구촌을 하나로 묶어내는 가공할 힘을 과시하며 이제 신의 경지에 오르려 한다. 그게 바로 경쟁력이니까.
점점 빨라지기만 하는 세상, 사람들은 ‘속도’에 대한 강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누구도 ‘속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럴수록 ‘천천히’ 그리고 ‘더 불편하게(?)’ 살아가려는 사람 들이 있다. 생태주의적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 마을의 사람들이다. 세계 각지에 많다.
그 사람들이 ‘생태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해 서로 살아 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을 이어주는 길은 다름아닌 현대문명의 총아라는 인터넷이다. 가장 느린 삶을 최고의 속도가 연결해주는 것이다.
이상향에 문명 침투하면 혹독한 대가
이제 인터넷을 타고 세계의 생태마을 기행을 시작하자. 여행비는 물론 공 짜다. 인터넷(www.gaia.org)에 접속하면 세계 각지의 생태마을 25곳으로 통하는 너른 길이 펼쳐진다. ‘생태마을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아메 리카, 유럽·아프리카·중동, 아시아·오세아니아 등 세 갈래로 나뉜다.
먼저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헬레나 노르베리-호지·녹색평 론)로 잘 알려진 히말라야산맥 깊숙이 자리잡은 인도의 라다크부터 찾아 가자. 현재 5천여명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외부 세계 와의 접촉없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생태마을의 이상을 집약적으로 실천 해왔다. 변화가 극심한 기후와 자원부족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이 마을 사 람들은 생태친화적인 전통 유기농법, 마을 어른과 가족을 통한 전통적인 지식전달체계와 교육으로 그들 나름의 삶을 꾸려왔다. 전통적인 라다크에 는 궁핍과 범죄, 공해, 민족갈등 따위 현대사회를 괴롭히는 사회적 질병 이 없었다. ‘생태와 문화를 위한 국제사회’라는 단체는 이 마을의 원형 적인 생태적 삶에 주목해 지난 76년부터 ‘라다크 프로젝트’를 20여년째 추진해오고 있다. 라다크를 지속가능한 발전과 공동체의 재생을 위한 운 동의 텃밭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인류의 ‘오래된 미래’ 라다크는 파괴되고 있다. 넓은 길로 는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산처 럼 쌓여 있다. 농경생활 속에서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가던 라다크 사람들 은 소비주의 마수에 걸려 일자리 찾아 헤메는 실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여성들은 대부분의 현대도시문명사회가 그렇듯이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 면서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속도가 이끌고 온 도시문명과 넘 치는 관광객들의 영향이다. 현재는 이렇게 역사가 일궈놓은 미래를 갉아 먹고 있다. ‘생태와 문화를 위한 국제사회’는 인도와 영국, 미국, 독일 , 스웨덴에 지부를 두고 라다크의 원형적 삶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 운동 을 펼치고 있다.
이제 멀리 아메리카 대륙 테네시 강변에 자리잡은 ‘더 팜’(농장)으로 가보자. 지난 71년 베트남전의 비인간성에 질린 일단의 샌프란시스코 히 피들이 세운 작은 생태마을이다. 80년대 초반 한때 1천2백여명까지 주민 이 늘어났던 이 마을에는 현재 마을 주변의 생물종다양성을 유지하기 위 해 2백50여명만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인 라다크와 달리 사람들의 의지가 이룩한 마을로 식품점, 의료시설, 학교, 우체국, 수도시설, 주유소 등 일 반 마을과 비슷한 주거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주민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집의 소유주가 아니고 유기농업 등 생태친화적인 직업 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마을의 공동운영을 위해 다달이 성인 1인당 75∼1백25달러(7만5천∼12만5천원)를 임대료조로 내며 산다. 애초 재활용 자재로 집을 지었던 이들은 지난 78년 이후에는 태양 열을 이용한 건축법으로 집을 짓고 살아간다. 공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주민 대부분이 채식주의자인 이들은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 일컫는다. 그 들은 이 마을에서 사는 이유로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연 속에서 뛰놀 수 있고,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가까이서 친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라 고 답했다.
지구 사랑하며 지속가능한 미래 추구
이번엔 그럼 유럽으로? 스코틀랜드 북동쪽 해변의 핀드호른공동체가 기다 린다. 지난 62년 처음 생긴 이 마을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3백50명의 사람들이, 그들 말대로라면, “특정종교나 신념을 배척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울려 살아간다.
네트워크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가이아 아르헨티나’에서부 터 이스라엘의 ‘게제르 키부츠’, 러시아의 ‘리소보’ 등 각지의 무지 갯빛 생태마을을 탐방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생태마을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인 데에는 지난 92년 브라 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환경회의가 영향을 미쳤다.
지난 94년 처음 결성된 생태마을 네트워크는 △지속가능한 인간거주(삶) 추구 △실험적 공동체 사이의 정보교환 △‘생태공동체’와 관련한 유용 한 정보를 외부세계에 광범하게 알리려는 목적을 세워 실천하고 있다.
리우회의의 ‘의제21’이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이를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실험적인 공동체가 있어야 하고, 이런 삶의 경험을 서로 간에 그리고 외부의 주류사회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여행과 배낭여행이 일반화한 요즘이다. ‘증명사진’ 찍기에 정신을 팔기보다는 이런 생태마을에도 한번 직접 찾아가보자.
이제훈 기자/ 한겨레 생활과학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