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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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29차 총회에서는 1백86개 회원 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인간게놈과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Universal Decl aration on the Human Genome and Human Rights)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선언은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생명공학 및 의학 분야의 인간유전 자 연구가 지녀야 할 윤리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 전범이라는 역사적 의미 를 갖고 있다. 그 주안점은 이 분야에서 과학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되 연 구결과의 잠재적 남용으로부터 인권과 인간성을 보호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 기준을 설정하는 데 두고 있다.
유네스코는 이번 선언을 위해 지난 4년간을 준비해왔다. 이를 위해 사무 총장인 페데리코 메이어는 1993년에 유네스코 산하에 국제생명윤리위원회 (IBC)를 창설했다. 여기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전문가 6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데, 과학자뿐 아니라 법률가, 철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등이 포함 되어 있다. IBC는 선언의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각국의 대학, 윤리위원회 , 정부기구 및 비정부기구에 광범위한 자문을 구했다. 선언 초안은 93년 에서 96년 사이 9번의 수정을 거치고 드디어 올해 7월 유네스코 본부에 모인 81개국의 정부전문가위원회에서 그 문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이 번 총회에 상정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이번 선언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라, 인간생식과 유전공학의 지식 이 급속히 발달한 80년대 초부터 생명윤리 문제에 대한 대중의 우려와 비 판이 점증하면서 발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여러 나라에서 속속 생 명윤리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현재 유럽연합에는 9개 국가에 이러한 위 원회가 있고 최근에는 이집트, 미국, 러시아에도 설립되었으며 스페인, 독일 등에서는 추진중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생명윤리 관련법이 제정되어 시행중이며 이러한 추세는 계속 확산되고 있다. 올 2월 영국 로슬린연구 소의 복제양 돌리 발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러한 추세에 기름을 붓는 구실을 했으며, 이제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인간복제 가능성과 그 윤리적 문제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과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네스코 선언은 세가지 원칙과 세가지 방향을 담고 있다. 세가지 원칙이 란 인간게놈을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란 개념으로 본다는 것, 유전적 특징 에 관계없이 각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게놈은 개인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결정론 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세가지 방향은 우선 개인의 권리보호를 위해 모든 연구와 치료 전에 사전 동의를 구하고 유전적 특징 때문에 차별받는 걸 금지하며 개인 유전자정보의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방 향은 지식의 진보와 보건 증진을 위해, 인간복제처럼 인간존엄성을 해치 는 연구를 제외하곤 과학의 자유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 째는 유전적 질병 혹은 장애에 특히 취약한 개인, 가족, 집단의 보호를 위한 사회적 연대와 게놈 및 유전학 관련 지식이전의 선진국/개도국간 국 제협력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 선언의 내용이 대체로 잘되었다고 본다. 문제가 있다면 이 선 언이 강제적 구속력이 없는 윤리 기준을 천명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선언에서 천명된 원칙을 실행하는 것은 각 회원국의 책임으로 맡겨져 있기 때문에, 실행과정에서 그러한 원칙들이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 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제대로 준수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오늘날 전지구적 시장경쟁 속에서 기업의 이해관계가 지배하고 과학연구는 이에 봉사하는 주된 도구가 되어감을 볼 때, 윤리적 고려는 현실적 힘에 밀려 뒷전으로 처질 위험이 크다고 보인다.
우리나라 정부와 국회에서도 최근 생명윤리와 관련한 법을 제정하거나 위 원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가운 일이지만 산업과 과학기 술의 육성론이 압도적인 우리나라 현실을 고려할 때 과연 윤리적 규제가 제대로 이뤄질까는 매우 의문이다. 생명윤리를 소중히 여기는 시민의식이 굳게 자리잡고 이에 바탕한 시민의 감시가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법이 나 위원회는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공산이 크다.
김환석/ 국민대 교수·사회학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