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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을 움직이는 ‘여성농민’

(사진/농촌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농민의 전망을 찾기 위한 농민과 학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여성들이 농촌을 지키고 있다.” 농촌 총각이 결혼을 못해 중국의 조선 족 여성까지 찾는 현실에서 뚱딴지 같은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을 들춰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95년 현재 농림업 취업자의 48.6%인 1백17만8천여명이 여성이다. 이 비율은 65년의 38%보다 10% 남짓 높은 수치다. 여성이 농촌을 떠받치는 절반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그 럼에도 여성농민은 홀대받고 있다. 기껏해야 농촌에 정착한 도시·조선족 여성의 성공담이나 미담이 들려올 뿐이다.

한국의 농촌도 과학기술혁명과 정보사회, 글로벌사회 등의 흐름에서 자유 로울 수 없다. 이미 우루과이라운드로 격심한 국제경쟁에 떠밀려 농촌과 농민의 주변화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급기야 빈곤의 누적과 공동체 의 위기에서 비롯된 농촌의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환경·식량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한국여성농민연구소(소장 박성자)가 지난 11월14일 ‘21세기 한국농업과 여성농민’이라는 주제로 마련한 학술회의는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여성농 민의 전망과 과제를 논의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여성농민이 농업생산력 발전을 담당하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식량위기에 대처하는 여성농민의 자질을 찾았다. 결론은 노령화로 치닫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정보화 기술을 습득하고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개발하는 등 전 문농업인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21세기는 여성농민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중앙대학교 김성훈 부총장은 21세기의 화두로 환경·식량·여성 문제 등 을 제시하며 가족농 중심의 환경친화형 농업의 육성이 여성농민에게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전업농 육성과 영세농의 탈농을 내세워 규모의 논 리로 글로벌 경쟁에 맞서려는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나라의 토지조건에서 아무리 경영규모를 확대해도 국제적 규모의 농 기업에 맞설 수는 없다. 식량자급률이 OECD 가입국 가운데 가장 낮은 26% 로 떨어진 것은 농업을 단순한 교역대상의 ‘상품’만을 생산·공급하는 개념으로 바라본 때문이다. 그는 한국적 소규모 가족농에서 우리 농업의 대안을 찾았다. 가족농을 육성해 환경우호적 농법을 개발하고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했을 때, 농민의 생활안정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주축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 여성농민들이 농촌의 절반을 떠맡아 환경과 식량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한국농업전문대학 김종숙 교수는 전문 농업생산자로서의 여성농민에 주목 해 우리나라 농업의 미래가 여성에게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여성 농민들은 시설재배농가에서 절대적인 몫을 감당하고 있다. 여성농민들은 농촌사회의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농업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부담 속에 서 농업노동에 많은 시간을 투하하면서도 농업경영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 고 농업보조자의 지위에 머물러온 게 사실이다. 그는 전문여성인으로서 여성농민의 과제에 대해 “21세기 농업의 규모화·전문화에 따라 경제적 인 구실뿐만 아니라 환경보전·문화적 구실이 중요하게 될 것이다. 여성 농민들이 농업을 환경·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도록 농업경영자의 자질을 확보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여성농민이 투철한 직업 관으로 구체적인 농업 경영목표를 세워 소비자와 손잡고 농사짓는 방안을 모색함은 물론, 농촌 가정의 경영인으로 나서야 한다.


노동부담 줄이고 도시와의 연대 강화

여성농민은 지방화시대의 농업·농정의 중심에 있다. 그럼에도 여성을 농 업의 주체로 세우려는 정책은 전무하다. 경기도의회 고은실 의원은 “중 앙·지방 정부가 여성농민을 농업의 주체로 보지 않고 푸대접만 한다. 여 성농민들이 컴퓨터나 농기계교육을 이수하고 작물재배교육을 받는 것마저 도 남편의 영농점수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게 현실이다”며 여성농민들이 지역사회에서 여성조직을 결성해 영향력을 확대할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 안했다. 전국여성농민총연합 윤금순 사무총장은 “현재의 농업정책은 여 성농민의 영농의욕을 떨어뜨려 이농을 부추기고 있다”며 새로운 농업정 책은 여성농민을 농업경영자로 인정해 농업경영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농민이 농촌을 반쯤 책임져도 사회적으로 '여성농민'은 존재하지 않 는다. 대통령 후보들이 앞다퉈 여성정책을 발표하면서도 여성농민 부분은 빠져있다. 여성운동권에서도 이들은 간과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여 성농민, 이제 그들 스스로가 나서고 있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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