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
|
(무교회 신앙은 성서의 가르침만을 따른다. 성서를 가르치고 배우는 게 곧 예배다. 사진 오른쪽이 노평구씨).
그들은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들이 일요일마다 모이는 곳에는 십자가가 없다. 성가대도 없고, 헌금주머니도 없고, 주보도 없다. 목사니 신부니 하는 설교자도 따로 있지 않다. 회의실에나 어울림직한 길고 네모난 탁자 와 딱딱한 의자, 그리고 성경이 그들 모임의 전부다. 그들은 물론 찬송을 하고, 기도를 올리지만, 그것을 예배라 부르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교회를 갖지 않고, 날을 정해 예배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다. 세상은 그들을 ‘무교회(無敎會)주의자’라 부른다.
교신, 함석헌… 그리고 노평구
노평구(85). 세상에 무교회 신앙인들의 존재를 아는 이가 드무니,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이름을 아는 이 역시 많지 않다. 신앙잡지 <성서 연구> 발행인이란 명함을 갖고 있지만, 그 또한 세상의 이목에서 멀기는 마찬가지다. 책은 많이 찍을 때도 1천부를 넘지 않았고, 지금은 4백여부 를 헤아리는 정도다. 무교회 신앙에 대한 명상과 일기로 다달이 30쪽 안 팎을 채우며 반세기를 이어온 게 대견할 따름이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이 땅에서 면면이 맥을 이어온 무교회 신앙처럼, 생색을 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무교회 신앙은 본디 일본에서 싹텄다. 성경이 신앙의 알맹이고, 의식은 성경에 붙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사상이 핵심을 이 룬다. 그에게 교회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 에 불과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부수었듯이” 그도 세속의 교회를 거부했다. 그의 사상은 김교신, 함석헌 등을 통해 이 땅에 무교회 신앙운동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런 스승들에 대한 늙은 제자의 기억 은 흠모에 가깝다. “김교신 선생이 흥남질소비료공장 노동자숙소에서 일 하시다 전염병으로 돌아가신 뒤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책꽂이마다 영자신 문이 가득합디다. 태평양전쟁의 와중에서도 세계의 흐름을 읽고 계셨던 거죠.”
그는 1912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국경에서 멀지 않던 곳이라 문 물교류가 왕성했다. 서양인들이 세운 교회가 있었고, 그것을 비웃는 사회 주의 혁명가들의 학교도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교회로 기울었 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못마땅해 했지만, 억지로 떼놓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한방서적을 소리내어 읽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의술을 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주변 사람들이 이제 병에 걸리면 고쳐줄 의사가 없구나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요즘 그런 아버지에게서 신앙인의 심성을 발견한다.
서울 유학생활은 사회주의와의 싸움으로 치열했다. 배재중학을 다니던 그 는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주의 이론과 맞섰다. 웬만한 소학교 아이들도 사 회주의 서적 한두권은 보자기에 넣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주변의 권 유와 유혹에도 끝내 그걸 거부했다.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해 1년 정도 옥고를 치렀지만, 그것 역시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 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놓고 세계의 지성들이 벌이는 논쟁을 읽으며 이 성과 신앙을 단련하곤 했다.
옥살이를 마친 그의 삶은 사회운동으로 발전한다. 이미 학업의 길은 막힌 터였다. 친구 두어명과 함께 지금의 마포구 도화동 세칭 토막촌(土幕村) 에 들어갔다. 한강변에 땅굴을 파고 살던 빈민들의 마을에서 그는 아이들 을 상대로 학교를 열었다. 오전반, 오후반에 야학반까지 3백여명의 아이 들을 가르치는,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중변소 를 치우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 다.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피로가 몰려오곤 했지만, 희생적인 노동이 주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운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사람들이 바뀌길 원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바람을 비웃었다. 폭력이 난무하는 싸움 과 노름, 그리고 잔인한 범죄에 길든 그들의 삶 앞에서 그의 운동은 초라 했다. 그는 좀더 근본적인 사회개조를 갈구했다. 그때 김교신이 간행하던 무교회 신앙연구지 <성서조선>을 만났다. 그건 어둠에 갇힌 그에게 햇살 같은 탈출구였다. 그건 믿음에 기반한 도덕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김교신 의 안내로 일본에 가서 우치무라의 제자인 쓰카모토(塚本虎二)와 야나이 하라(矢內原忠雄)로부터 무교회 신앙을 공부한다.
"미움이 살인, 탐욕이 도둑질”
그는 평생을 도덕에 매달렸다. <성서조선>의 뒤를 이어, 1946년 <성서연 구>를 내기 시작한 이래, 그는 줄곧 도덕 위에 선 국가를 꿈꿨다. 해방 후 50여년 동안 그의 얄팍한 잡지는 양심, 도덕, 자각 등의 낱말로 점철 돼 있다. “그게 세상물정에 어두운 허튼 짓”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가 말하는 도덕이란 게 여간 엄혹한 게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그의 훈계는 그저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따위가 아니 다. 그에게는 미움이 살인이고, 탐욕이 도둑질이고, 음욕이 곧 간음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외계인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현실 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신앙인으로서 발언이 필요할 때, 그는 <성서연구>를 통해 격렬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정치 권력이 무서워 교묘하게 돌려쓰지도 않고, 그저 읽기 좋으라고 문장을 꾸 미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연대순으로 읽으면 마치 종교적 입장에 서 서술한 역사비평을 보는 것 같다. 예컨대 군사정치에 대한 그의 비판 은 이렇다. “나는 요새 3군참모가 연일 정사로 분주한 것을 볼 때 무서 워 밤에 잠이 잘 안 온다. 거짓말과 불화와 권모술수와 욕심을 미워하시 는 하나님이 무서워서다. 국사에 임하는 자 오로지 사심없이 거짓말을 말 고 정직하게 하라.”(1963년 3월호) 베트남 파병에 대한 비판은 장렬하기 조차 하다. “도대체 정치가는 물론 전체 지도자가 국민에 대한 사랑, 동 정이 없다. 아! 저들에게 따뜻이 의식주는 못 줄망정, 그래 자국지란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 피어나려는 백성을 또다시 수만리 외국에 몰아내는 것 이냐.”(1965년 7월호)
그들은 지난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집회를 가졌다. 참석자는 10여명에 불 과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 땅 무교회 신앙의 오랜 전통답게 시종 묵직 하고 엄숙했다. 참석자들은 대개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몇몇은 두꺼운 돋 보기 안경을 썼다. 전직 교수, 중소기업인, 중견 관리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도 그 자리에 있었다. 50년 넘게 지켜온 자리다. 그는 그날 나이 를 무색케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제자들을 다그쳤다. “믿음에서 우 러나오는 선한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사진 정진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