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성
|
|
7백년쯤 전, 고려 충렬왕 때다. 대부경 벼슬에 있는 박유가 상소를 올렸 다. “신하들에게 모두 첩을 두게 하고, 품계에 따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수를 줄여서 서민에 이르러서는 아내 한사람과 첩 한사람을 두게 법제 로 만든다면, 홀어미의 원한을 풀어주고 인구를 번성시킬 뿐아니라 백성 을 위한 도리이겠습니다.”
박유가 이런 상소를 올리게 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는 평소 이렇게 주 장했다. “우리나라는 음양오행 법칙상 음이 강하여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다. 나라의 법은 지위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한 아내로 그치고, 아들없 는 사람도 첩을 두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아내를 얻는 데는 제한이 없으니 인물이 모두 북쪽으로 흘러갈까 걱정이 다. 그러니 첩을 여럿 둘 수 있게 법을 고쳐야 한다.”
그때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고려 왕은 몽골 공주와 결혼해 야 했고, 한해에도 몇차례 고려 여인들을 바쳐야 했다. 박유의 상소는 이 런 사태를 걱정한 끝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커다란 파문이 뒤따랐다. 여 인들은 나이와 빈부귀천 가림없이 모두 화를 내며 박유를 원망했다. 고려 는 나중의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 재산상속이나 제사를 모시는 데 아들딸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결혼한 여자도 자기 명의 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더구나 성리학 윤리가 보급되기 전이라 고려 여인은 삼종지도에 순종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첩제도를 만들자는 박유의 상소에 여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박 유야말로 고려의 간 큰 남자라 할 만하다.
하루는 왕의 행차가 있어 박유가 수행하게 됐다. 구경꾼 대열에 섰던 한 노파가 박유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첩을 두자고 상소한 자가 바 로 저 빌어먹을 늙은이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길거리가 걷어붙인 여 인네들의 팔뚝으로 가득 찼더라”라고 고려말의 대학자 이제현은 문집 < 역옹패설>에 써놓았다. 박유의 상소는 일단 보류됐다. “재상들 가운데 아내를 무서워하는 이가 있어서”라고 <고려사> ‘박유 열전’은 전한다. 그러나 박유의 주장이 얼마 안 가 다시 거론된 모양이다. 5년 뒤, 왕이 상민(上民)으로 하여금 서처(庶妻)를 거느리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다. 서처란 본처를 둔 사람이 양갓집에 다시 장가들어 얻은 처를 말한다. 서처 자식도 본처 자식처럼 벼슬할 수 있게 하고,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 린 채 본처를 학대하고, 새로 얻은 처만 데리고 사는 자에게는 벌을 주라 는 단서가 달렸다. 다처제가 법제화되려는 순간이다.
그때 김혼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대장군 김혼이 동료 김문비의 집에 놀러가 바둑을 두곤 했는데, 김문비의 처 박씨가 그의 인 품과 용모를 칭찬했다. 김혼도 박씨에게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다. 김문비 가 죽고, 김혼의 아내도 죽자, 박씨가 마음을 전해왔다.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김혼은 박씨를 찾아갔고, 그 일이 알려져 섬으로 귀향가게 되었다.
당시는 재혼이 자유로웠고, 김혼과 박씨 둘 다 배우자를 잃었으니, 둘이 결혼한다 해서 지탄받을 일은 아니었을 게다. 대장군이란 높은 벼슬에 있 는 자가 예를 갖춰 정식 아내로 맞지 않고 사통하여 사회윤리를 어지럽혔 다는 이유로 죄를 씌웠지 싶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서처를 거느리라는 왕의 명령은 중지됐다. 김혼처럼 예를 무시하고 나아가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많아질까 염려한 까닭일 게다.
법이 일부일처제로 되어 있든 아니든, 사람은 사랑하고 결혼한다. 김문비 의 처 박씨를 보면 사랑과 결혼에 대한 고려 여인의 생각은 매인 데 없이 퍽 솔직하고 자유로웠던 모양이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