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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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홍보를 위해 전단을 돌리는 여학생들. 대학만이라도 남녀의 기회와 역할이 동등해지는 것이 이들의 희망이다.)
“이 계단을 지나는 남학생들은 성폭력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11월11 일 연세대 옛 상대 앞 계단에 나붙은 방 하나가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었 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계단을 지나던 남학생들은 이내 자신들의 몸 위로 쏟아지는 여학생들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여학생들은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남학생의 아래위를 훑어본 뒤 판정을 내렸다. “쟤는 허우대는 좋은데 옷입은 게 뭐 저래, 비 제로(B0).” “아냐, 시(C)도 아까워. 숏 다리잖아.”
‘고역의 계단’에서 열린 남성품평회
평소 이곳은 연세대 남학생들이 둘러앉아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용모와 몸 매를 품평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다. 여학생들에겐 불쾌감을 견뎌내야 하 는 ‘고역의 계단’이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반대였다. 여학생들이 계단 양옆에 진을 치고 남학생들을 품평했다. 이른바 ‘역 성희롱’이었던 셈 이다. 참석자들은 이곳을 ‘이갈리아의 계단’으로 불렀다. 남성과 여성 의 성역할이 뒤집힌 여성우월사회를 묘사해 남성중심사회의 편견을 비판 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든베르그 지음)에서 따온 이름이 다.
여자대학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겉보기에 ‘분리’보다는 ‘공존’을 지 향하는 시대인 것 같다. 그러나 아직 남녀공학 대학에서 관철되고 있는 논리는 여전히 ‘남학생을 위한, 남학생만의 학교’라는 게 여학생들의 인식이다. 연세대만 해도 여학생의 비율이 전체의 37%이지만, 여학생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기회와 권리가 수준 이하라고 입을 모은다. 한 4학년 여 학생은 “남자 꼴찌까지 입사추천서가 돌아가고 나서야 여자 일등에게 순 서가 온다”는 말로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남녀차별적 대학사회에 여학생들이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연세대 여성학 강좌를 수강하는 프로젝트팀 ‘여학생문화포럼’은 여학생의 정체 성을 되짚어보고 진정한 남녀공학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 지난 11월10∼ 15일 여성문화제 ‘내가 선 자리’를 열었다. 주제는 간단하다. “대학에 서 사라진 여학생의 목소리를 되찾자”는 것이다. 행사기획을 맡은 사회 학과 강민주(20)씨는 “37%를 무시하려면 왜 여학생들을 그렇게 많이 뽑 았는지 묻고 싶었다”며 참가 이유를 밝혔다.
행사주간 내내 여성 록그룹과 여성 풍물패의 문화공연이 교정 곳곳에서 열렸다. 연대 출신 여성동문들이 강연한 ‘여학생들이여, 꿈을 펼쳐라’( Girls Be Ambitious)는 특히 후배들이 열광한 자리였다. 유통업체인 (주) 성주인터내셔날 대표 김성주씨는 남성 위주의 대학을 매섭게 몰아쳤다. “대학이 내게 해준 게 뭡니까. 여성들은 남성위주의 대학과 사회에서 그 능력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집니다. 그걸 뒤집어야 합니다.”
남학생들의 반응은 그렇게 높지 못했다. 행사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려 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 봤자 소용있냐”보다는 “그런 심정을 알 만 하다”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는 게 중론이다.
대학에서 여학생은 조연일 뿐이다
‘내가 선 자리’ 기획단에 동참한 단 두명의 남자 가운데 한명인 이종호 (25·사회학과)씨는 “그동안 대학의 모든 행사에 여학생들이 얼마나 보 조적인 구실만을 강요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고 평했다. 행사의 기획· 집행 경험이 없어 시행착오를 겪는 여학생들을 지켜보면서 이씨는 ‘따까 리’의 처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 남녀공학대에서 여학생들의 위치를 보면 주인공인 남학생을 위한 조연에 불과합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동등한 대학의 주인이라면 그 기회와 역할도 동등해야 합니다.” 행사 자문역을 맡은 사회학과 조혜 정 교수의 말이다. 남성위주 대학문화는 남성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여 성들만이 바꿀 수 있다. '내가 선 자리'는 변화를 향한 여대생의 의미있 는 첫 시도로 기록될 것같다.
구본준 기자/ 한겨레 민권사회1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