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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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텅텅 빈 국회. 의원들이 눈앞의 대선에 매달리면서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법안이 정부부처와 이익단체의 로비에 좌우되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대통령선거운동에 매달리면서 국민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주요 법안들이 여론 수렴절차나 깊이있는 심의과정 없이 졸속 처리 되고 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권력의 공백상태가 심화되자 자신의 이익 을 실현하려는 정부부처와 이익단체들의 로비가 극성 각종 법안들의 왜곡 이 우려되고 있다.
당론 수렴도 없이 형소법개정안 강행처리
지난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영장실질심사제도 축소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이 법안은 판사가 전권을 갖고 구속 피의자를 직접 심문하도록 규정한 현행 영장실질심사제 도를 피의자 또는 그 변호인 가족 등의 요청이 있고 수사기록만으로는 구 속사유를 판단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만 선별적으로 할 수 있 도록 고친 것이다.
법안 개정은 지난 8월29일 “수사기관의 애로 해소”를 명분으로 내건 이 건개 의원(자민련)이 자민련과 신한국당 국민회의 의원 27명의 서명을 받 아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그동안 강한 반대 여론에 밀려 심의가 이뤄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날 이 법안이 전격 처리된 것이다. 곳곳에 졸속처리의 흔적이 엿보인다. 여야 3당은 형사소추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요한 법안을 당론 수렴과정도 없이 법사위 소속 의원들 개인의 판단에 맡겨 처리했다. 더욱 이 법사위에 소속된 같은 당 의원들조차 의견을 제대로 교환하지 않아 입 장이 서로 엇갈릴 정도였다. 국민회의 천정배 의원은 개정 자체를 반대했 지만 같은 당 소속인 박찬주 의원은 수정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런 상황 에서 나머지 5명의 검찰출신 의원들은 법안에 동의했다.
정치권에서는 검찰출신인 이건개 의원 등이 개정안을 마련한 뒤 국민회의 와 자민련의 공조분위기를 이용해 국민회의쪽 검찰출신 의원들을 설득했 고 또 검찰의 적극적인 로비를 앞세워 신한국당 검찰출신 의원들의 동의 까지 이끌어냈다는 뒷말이 무성하다. 특히 국민회의 지도부가 검찰과 자 민련을 의식해 수수방관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실제 국민회의 박 상천 총무는 그동안 졸속개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당이 개입 할 때가 아니다”라며 당론 수렴을 게을리 했다. 그런데 최근 당 소속 의 원들에게 “대선을 앞둔 시점인 데다 지난번 비자금 사건을 유보한 점 등 을 참작해 17일 법사위 전체회의 때 개정안에 찬성해 달라”고 요청한 사 실이 확인됐다. 검찰의 로비와 정치권의 묵계를 엿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졸속처리를 바라보는 시민·사회 단체와 법조계의 반발은 거셀 수 밖에 없다. 대법원은 이날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정하려는 것은 국회가 입법권자로의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라며 정면대응을 결 정했다. 서울지법 소장판사들도 “피의자가 심문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단순한 은혜적 조처나 반사이익이 아닌 헌법상 보장된 구체적 권리로서 이를 제한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도 “대통령 선거 경제혼란 등으로 국민의 관심이 줄어 든 틈을 탄 졸속입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국인권단체협의회는 “검 찰의 수사편의를 목적으로 검찰과 검찰출신 일부 의원을 제외한 국민 그 누구도 찬성할 수 없는 인권후퇴법안”이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국민적 저항 운동을 펼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논란 전자주민카드 내무부 안대로 처리
같은 날 국회 내무위원회를 통과한 주민등록법 개정안 또한 졸속입법의 전형이라는 비난을 면치못하고 있다. 현행 주민등록증 대신에 통합전자주 민카드에 주민등록증 수록사항, 주민등록초본 수록사항 병역사항 지문 등 을 수록하도록 한 이 법안은 오로지 내무부 편의만을 담고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하지만 자민련이 그동안 반대 당론을 졸지에 바꾸면서 찬성쪽 으로 결론이 났다. “전자주민카드 도입이 초래할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 할 때 국민여론을 충분히 고려해야 마땅했다”고 지적한 참여연대 박원석 연대사업부장은 “자민련 등 정치권이 권력공백을 이용해 자신의 이해를 실현하려는 내무부의 로비에 넘어갔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고 평가했 다.
통합전자주민카드 반대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시민단체 공동대책위원 회(공대위)는 “수록사항이 몇가지 빠진 것 외에 본질적인 위험은 그대로 안고 있다”며 “내무위원들의 단견과 무지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입장은 더욱 강경하다. “그 어 떤 가치보다도 소중한 인간을 전자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시스템”이라며 “관련법을 통과시킨 국회 내무위원들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전개할 것이 고 이 법이 통과된다면 발급거부 국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권력기구의 로비의혹을 제기한 전국연합의 한 관계자는 “특히 안기부에 서 이 법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통과를 위해 노력해온 바 있다” 며 “법안 통과는 정보기관에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날개를 달 아주는 꼴”이라고 우려했다. 공대위 등 시민·사회 단체는 11월15일 신 한국당사에서 농성을 진행한 데 이어 본회의 처리를 저지하기 위한 집회 를 잇따라 열 계획이다.
로비 의혹 받는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
(사진/지난 11월14일 열린 전자주민카드 시행 반대 집회.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될 경우 발급거부 등 국민불복종 운동을 펼 것임을 경고하고 나섰다. )
졸속 시비에 휘말인 법안은 이만이 아니다. 지난 10일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한 지방교육자치법개정안도 교육관련 단체로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 해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토론회나 공청회 한번 없이 처리한 것 은 선거 등 혼란을 틈탄 정치적 야합”이라며 법안이 확정될 경우 “노동 법 기습처리 때와 같은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들 이 분노하는 것은 법안 개정의 핵심이었던 교육청이나 교육위원회 등의 구조개편안 등은 빠진 채 교육감 선출 문제만을 수정한 개정안으로 국민 을 우롱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개정안은 교육감과 교육위원 선출 과 정에서 돈을 주고받는 등 문제를 발생시킨 현행 ‘교황식 선거방식’을 해결하기 위해 선거인단을 통해 교육감을 선출하자는 내용이다. 국·공립 학교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사립은 학부모회나 육성회에서 선거인단 대표 를 뽑고 법정 교원단체(곧 한국교직원총연합회)에 선거인단의 일정지분(3 %)을 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전교조 이경희 대변인은 “여전히 문제는 고쳐지지 않았다”고 단 정하고 있다. “학부모회나 육성회는 임의기구로 그동안 교장과 결탁한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며 “여기서 선거인단 을 구성할 경우 교장단의 요구를 따르는 거수기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는 주장이다. 또 교총에만 3%의 선거인단을 배정하는 것은 교총에 소속되 지 않은 나머지 50%의 교사를 완전히 배제하는 악법이라는 것이다. 전교 조 등은 이 법안이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과 선거권,그리고 기본권의 본질 적 내용 침해금지 조항에 위반된다며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다. 교육계 의 한 관계자는 “이번 법안 통과 과정에 교총 등 이익단체의 로비가 있 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교육위원회를 13일 통과한 영재교육진흥법안도 비판의 대상이다. ‘누구나 정보를 생산해 낼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영재들만이 정보를 생 산해 낼 수 있다’며 제안된 이 법안은 △영재교육대상자를 교육감이 선 정 △영재학교 설치 운영 △고등학교 및 대학교 학생 선발시 영재교육 대 상자에 대한 특별전형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창조성과 다양성을 살리는 교육목표는 무시한 채 정보산업이라는 특정분야만 따로 떼어 초등학교부터 특별교육을 실시하려는 발상으로 국민 평등권과 보통 교육 목표에 위배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더욱이 현재의 교육현 실에서 영재교육을 실시할 경우 특수목적고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같이 영 재교육기관이 입시기관화돼 입시경쟁이 초등학교까지 확대될 우려가 있다 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자금세탁방지법은 논의조차 안 해
이렇게 국민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법안들이 정치권의 표계산과 이익단 체의 로비 속에서 졸속처리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숨가쁜 상황에서도 정 치권은 제 이속만 차리는데 정신없다. 검은돈의 뒷거래를 막기 위해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했다가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된 자금세탁방 지법은 13일 국회 재경위 세법심사소위에 다시 올려졌다. 하지만 여야 의 원들의 입장 차이를 이유로 논의조차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10 월31일 처리된 정치자금법도 두달 이상 논란이 계속된 정치인에 대한 ‘ 떡값’ 처벌 조항을 만들면서 정치자금을 ‘정치활동을 위해 제공하는 금 전’으로 규정해, 주는 사람이 정치자금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얼마든 지 받아들일 수 있는 뒷길을 터놓았다.
결국 정치권은 제 이속은 차리면서 정작 국민에 영향을 주는 법안에는 성 의없이 대처하고 있는 셈이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7일 제 1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