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어깨동무' 정치

김정란/ 시인·상지대 교수

혹자들은 3공화국의 선택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물질적 근대화는 당시 사활이 걸린 문제였으며, 그 덕에 우리가 빠른 속도로 선 진국 문턱에 진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의 경제정책 실패 때문 에 이런 논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한다. 그리곤 이런 말 뒤에 꼭 따라 나오는 말이 있다. “한국사회는 아직 멀었다. 아직은 반(半)독재를 해야 한다. 내버려두었더니 꼴 좀 봐라.”

3공화국이 남긴 최악의 유산

이런 논리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3공화국의 선 택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최종적인 평가는 후세의 몫으로 돌리자. 지금은, 3공화국이 생산해낸 무수한 독소들을 하루빨리 극복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의 가까운 근원은 모두 3공화국 이 생산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개발독재이데올로기로 밀어붙여져 마구잡 이로 쌓아올려진 경제의 성(城)도 지금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 “하면 된다”고? 아니 “제대로 해야만 된다.” 아무렇게나 하면, 반드시 덧난 다. 문민정부의 실패는, 겉옷만 갈아입었을 뿐, 실상은 전혀 군사문화와 다를 바 없는 멘탈리티를 가진 정치의 실패다. 문민정부의 좌절은 문민적 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엉터리로 문민적이었기 때문이다.

3공화국이 생산해낸 많은 문제들 가운데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지 역감정’이다. ‘지역감정’이라는, 실체도 없는 유령에 의해 우리는 너 무나 오랫동안 마구잡이로 휘둘렸다. ‘광주’마저도 결국은 그 유령이 생산해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다. 나는 서울 사람이다. 나 개인은 지역감정의 덕도 손해도 본 바 없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 사회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문제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가 근대 적 합리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감정은 3공화국의 ‘근대화’가 생산해낸 무원칙주의의 산물이 다. 물질적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3공화국은 결핍돼 있는 정치 적 정통성을 가장 전근대적인 감정에 기대어 보상받으려 들었다. 밀어붙 이기 위해서, 가능한 한 토론하지 않으려 들었던 것이다. 아주 간단히 말 한다면 ‘끼리끼리 해먹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 이전 의 문제였다. 정치집단은 원시적인 패거리집단과 비슷한 정서에 의해 지 배되었다. 이른바 ‘TK정서’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생각해보자. 이 말이 왜 ‘대구정서’라고 대놓고 불리지 않고, 굳이 TK라는 모호한 암호 뒤에 숨겨지는가를. 그것은 무언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 뭣한, 김영삼 이 YS고 김대중이 DJ라는 건 천하가 다 알지만, 어쩐지 김영삼 김대중, 그렇게 말하긴 아직 뭣해서, YS, DJ하고 옹색스럽게 말하듯이… 무언가 대놓고 말하기엔 좀 낯뜨거운, 따지고 들면 떳떳하게 주장하기 힘든, 논 리적 분석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꿉꿉한 정서, 황태자 의식,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자. 어떤 집단적 왕자병.

이런 애매모호한 정서에 기대고 정통성 없는 정권이 연명해가는 동안, 우 리의 정치의식은 형편없이 뒷걸음질쳤다. 정치가 정서적 문제로 고착되었 다는 말이다. 툭하면 사상문제를 들고 나오지만, 그건 전혀 본질적인 문 제가 아니다. 사실은 정책도 이념도 사상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호남 권 정치인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뿐이다. 그냥 무턱대고 싫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반대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조 작된 이미지는 논리적 층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최면처럼 대중의 무의식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누가 아닌가”

개발독재는 자신의 논리를 다중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호남지방을 집단적 타자(他者)로 만들었다. 자아동일성의 형성은 가장 유치한 수준에서는 “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나는 누가 아닌가”라는 것부터 확인한 다. 독재정권은, 비호남인들에게 다행히 “나는 구박받는 ‘다른 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안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서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어쩐지 싫은’ 이미지가 호남지방에 몽땅 투사됐다. 그리고 정치는 정책도 이념도 생산해내지 못한 채, 형님 아우 하며 어깨 동무하다가 세월만 다 보냈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역정서’를 뒤흔들어서 무화(無化)시켜야 한다. 그 렇게 해서, 정서적으로 변질된 정치를 합리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 특유의 패거리의식이 사라진다. 그것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려 든다면, 당신은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지금 세계는 그런 식의 원시적 감정을 가지고는 전 혀 대처해나갈 수 없는, 극도의 세련성을 요구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 기 때문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