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외국인투자자, 그만 팔게 하라

(사진/외국인투자자들의 매도행진이 멈추지 않는 한 주가 최저치 기록은 시간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여의도 증권거래소 모습.)

지난 11월7일 증권시장은 투자자들의 한숨소리로 다시 한번 가득 찼다. 종목에 관계없이 ‘팔자’ 주문이 쏟아지면서 종합주가지수가 무려 38.24 포인트나 하락한 것이다. 이날 주가의 하락폭과 하락률(6.9%)은 증시가 문을 연 이래 사상최대치였다. 10월29일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나온 뒤 이 달 들어 5일 동안 무려 85포인트가 오르는 등 활기를 띠던 주식시장은 대 책이 발표된 지 열흘도 안 돼 그렇게 힘없이 주저앉았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확대도 별무효과

사실 일시적인 반등세를 보였지만, 증권시장은 결코 안정적인 상황이 아 니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주가하락을 부채질한 외국인투자자의 ‘팔자’ 주문이 수그러들지 않은 때문이었다. 11월3일의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확 대는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해외자금을 증시에 끌어들이는 데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한도확대 당일 외국인투자자들은 모두 1천1백6억원어치의 주식을 사들였지만, 이는 94년 이후 그동안 5차례에 걸쳐 이뤄진 한도확 대 당일 순매수액 평균(5천5백29억원)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한도확대 사흘째인 5일부터 외국인들은 다시 ‘팔자’로 돌아섰다(표 참 조).

정부가 사실상 기관투자자들의 주식 순매수를 ‘자율결의’ 형태로 유도 했지만, 매도행진에서는 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관투자자들은 증시가 반등을 시작한 지난 1일부터 1주일 동안 날마다 매도우위를 보이면서 7일 까지 2천2백20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그런데도 그동안 주가가 오른 것은 전적으로 개인투자자들의 가세 덕이었다.

지난달 27일 2조6천억원대로 신용융자잔고(3조8백41억)에 크게 못미치던 고객예탁금은 11월6일까지 6천5백59억원이 늘어났다. 외국인투자자들의 순매도를 감안하면, 1조원대의 자금이 증시에 새로 들어온 것이다. 증권 가에서는 이 자금이 단기차익을 노린 투기성 자금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 견이 많았지만, 어쨌든 외국인투자자들의 매도세가 멈추기만 한다면 증권 시장이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는 쉽게 무너져버렸다.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에 긴급구제금융을 요청 할 계획이다.” “정부의 외환보유고가 1백50억달러에 불과하다” 따위의 외국언론의 보도에다, 정부의 환율방어선인 9백75선이 무너진 데 따른 것 이다.

그동안 매수우위를 보여온 일부 기관투자자들도 이제는 “외국인의 순매 도가 강화되는 마당에 순매수를 계속하면 결국 외국인들에게 팔 기회만 주는 것 아니냐”며 매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증권 전문가들 은 “외국인투자자들의 매도행진이 멈추지 않는 한 90년대 들어 최저치였 던 92년 8월21일의 459.07포인트도 결국 깨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고 증시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말한다.

선물시장 현물도 팔아치운다

지난 8월 이후 그동안 외국인투자자들은 모두 1조3천9백억원어치의 주식 을 순매도했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던 국내 주식물량(전체의 13%) 가운데 10% 이상을 팔아치운 것이다. 이들은 최근 들어 그동안 선호종목이던 에 스케이텔레콤, 삼성전자, 포철 등의 주식까지 마구 내다팔고 있다. 한때 70∼80%까지 장외프리미엄이 붙던 에스케이텔레콤만이 현재까지 10% 정도 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될 뿐, 나머지 주식들은 이제 프리미엄이 아예 없다. 증권가에서는 에스케이텔레콤의 프리미엄도 하락행진을 계속할 것 으로 내다보고 있다.

외국인투자자들이 매도행진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환율상승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10월30일 정부의 강력한 개입으로 한때 멈칫하 던 환율은 다시 치솟고 있다. 금융기관들의 달러부족은 이미 심각한 상태 여서 환율상승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다. 대외신인도가 떨어진 종금사들 과 일부은행들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 매일밤 늦게까지 외국의 자금시장을 떠돌고,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를 우회적으로 대출받아 겨우 ‘달러부도 ’를 넘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산요증권의 부도사태로 엔화가 약세로 돌아선 것도 환율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투자신탁회사의 한 관계 자는 “1천원은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1천1백원대를 훌쩍 넘을 것으로 보는 외국인 투자자들도 많다”고 말한다.

외국인들이 선물시장에서 12월물(결재일, 12월11일)에 대해 매도포지션을 대량으로 취하면서, 의도적으로 KOSPI200지수 종목을 팔고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있게 나오고 있다. 지난 6일 외국인들의 선물시장 매도잔액은 1만3 천9백55계약(순매도계약수 2천47계약)을 기록해, 7일의 주가급락으로만 외국인투자자들은 26억여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12월물 선 물시장은 주가가 떨어질수록 외국인들이 이익을 낼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만큼 한국증시 이탈을 노리는 외국투자자들이 선물시장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앞으로도 현물을 팔아치울 가능성은 높다.

정부의 10·29금융안정대책 가운데 아직 ‘연·기금의 주식매입확대’의 효과가 남아 있기는 하다. 공무원연금, 국민연금, 사학연금, 체신보험기 금, 고용보험기금 등 5개 연·기금은 5천억∼1조원 가량을 증시에 투입할 예정이다. 그러나 연·기금의 증시유입도 만약 정부가 매수를 사실상 지 시할 경우 선물시장에 영향을 주는 만큼 투자자들의 반발에 부닥칠 것이 라는 우려가 높다. 현재로서 기대할 것이 있다면, 오직 고객예탁금이 아 직 신용융자잔고보다 4천억원쯤 많다는 점 정도다. 그런데도 정부는 “무 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는 등 실물경제의 흐름으로 보아 상황이 결코 비 관적이지 않다”며 불안요인을 외국언론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

그러나 금융권은 정부의 이같은 시각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주가하 락을 막기 위해서는 환율상승을 막아야 하는데, 정부의 환율방어능력이 거의 한계치에 이르지 않았느냐는 우려가 팽배한 것이다. 실제로 정부의 환율저지선은 11월5일 9백70원, 6일 9백75원, 7일 9백80원으로 후퇴를 거 듭하고 있다. 대우증권 곽영교 국제영업팀장은 “근본적으로 금융기관의 신인도 하락, 외환보유고 부족 등이 환율상승을 부르고 있는 만큼 조만간 외국인 매도세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IMF 돈 빌릴까 말까

그렇다면 과연 대책은 없을까? 금융권에서는 “단기적인 대책은 이미 한 계에 도달했으며, 오히려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신만 부추긴다”고 강조한 다. 외국의 장기투자자금을 붙잡으려면 당장은 경제가 어렵더라도 경제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외국인 투자자들 가운데는 현재 국내 주가가 저평가돼 있 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대한투자신탁 손장수 국제영업부 차장은 “외국인 투자자들은 부도유예협약이 처음 등장하면서 이탈을 시작했다”면서 “결국 금융시스템을 정상화하는 것이 당장은 효 과가 적더라도 중장기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증권 사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자구노력을 벌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외국 인 투자자들의 눈에는 기대에 턱없이 못미치고 있다”면서 “대기업들이 상황이 나빠지면 정부의 구제금융이 지원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연쇄부도를 무엇보다 우려해온 정부가 이제 와서 부도의 칼날을 들이대며 더 큰 폭의 자구노력 을 요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이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구제금융을 지원 받는 편이 낫다는 주장도 조심스레 거론되고 있다. 현재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로는 환율방어에 어차피 한계가 있는 만큼 구제금융을 통해서라 도 환율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국제통 화기금에 지원을 요청할 경우 빌릴 수 있는 돈은 한국쿼터의 3배인 30억 달러지만, 인도네시아와 타이의 경우를 감안하면 최고 5배인 50억달러까 지다. 그러나 긴급구제금융 지원요청은 정부로서는 결코 선택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실물경제는 양호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정부의 주장과 달 리 한국경제가 실제로 어렵다는 것과 정부의 대응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 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국제통화기금 이 금융시장개혁, 산업구조조정 등 자구계획을 함께 요구한다면, 정부의 경제운용의 운신폭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정부로서는 잃는 것이 너무 크다. 누구 도 딱부러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 앞으로의 상황을 낙관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국면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번 금융 시장 안정대책이 “당장 눈앞의 성과에만 급급한 대증요법들은 결국 우리 경제에 더 큰 짐으로 돌아올 뿐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다 시 한번 증명해보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