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외화대란, 금융기관 대폭발 온다

“하루하루가 죽을 맛입니다.”

A종금사 외환딜러인 이 과장의 입에서는 한숨부터 나온다. 달러부족으로 인한 지급불능 사태를 막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달러잡기에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이다. 오전 9시께 열리는 홍콩과 도쿄 외환시장에서 부터 이 과장의 달러잡기는 시작된다. 원하는 만큼 달러를 구하지 못하면 오후 4∼5시부터 열리는 런던 외환시장에 매달린다. 런던시장에서 달러를 잡으면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아시아와 유럽에서 허탕을 친 날은 다시 밤 10∼11시부터 열리는 뉴욕시장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겨우 한숨 을 돌리고 나면 다시 다음날 아침에 시작될 달러전쟁에 대한 걱정에 몸과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사표 써들고 “살려 달라”

종금사 단독으로 해외에서 외화를 빌려오는 게 불가능해진 것은 이미 오 래 전 일이다. 11월 들어서는 전적으로 은행들의 도움을 받아 하루 하루 를 버티고 있다. 국책은행의 외환딜러는 “하루에도 10여개 이상 종금사 들로부터 지원요청이 쏟아져 혼란스러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일부 종금 사 외환담당 임원들은 사표를 써들고 매일 아침 거래은행의 행장실로 출 근해 “살려 달라”고 하소연을 하는 진풍경까지 벌이고 있다. 해외차입 에 비해 연 2% 이상 금리를 더 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고 아예 국내 원- 달러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구하는 곳도 많다. 그나마 지난 11월6일 이후 원화환율이 매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국내 시장에서조차 달러를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국내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외 환 담당자들도 달러부족에 따른 사재기를 감안할 때 1달러=1천원시대 돌 입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10월 한달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이던 외환위기가 10월 말을 고비 로 다시 극도로 악화되고 있는 것은 외국 금융기관들이 우리나라 금융기 관에 빌려준 달러를 앞다퉈 회수하고 있는 데다 신규차입은 더욱 어려워 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말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S& P가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한단계씩 낮춘 것이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주었 다. 종금사의 한 외환담당자는 “외국 금융기관들이 한국에 자금을 빌려 주는 한도를 축소하면서 만기가 돌아오는 자금에 대해 연장을 해주지 않 고 있다”면서 “한도를 줄이지는 않았더라도 신용도가 떨어지는 종금사 에 대해서는 아예 등을 돌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국 내은행과 종금사들이 만기 하루짜리(1일물) 외화자금을 급전으로 돌려 연 명하고 있다. 외화차입 규모가 큰 은행들의 경우 그 규모가 3억∼5억달러 에 달하고, 종금사들도 수천만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금융기관들의 외화자산 축소 움직임은 이미 올해 초 한보사태가 터 진 이후부터 가시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금리부담이 늘었을 뿐 차입 자체 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달러 를 빌려주겠다는 외국 금융기관이 사라진 데다 그나마 한두곳 있더라도 금리를 터무니없이 높게 부르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외화차입 금리 는 리보금리(런던은행간 금리)에 0.2∼0.3%를 얹은 수준에서 형성됐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리보+1% 선으로 올라가더니 다시 리보+1.5% 수준 이 상으로 높아졌다. 은행들은 종금사들에 비해 사정이 낫다고 하지만 어렵 기는 매한가지다. 최근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낫다고 하는 일부 국책은행 과 시중은행이 외화차입을 추진하다가 금리가 높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 졌다.


금융시스템 붕괴로 이어질 수도

국내 금융기관들도 보유자산을 매각하는 등 자구노력을 펴고 있다. 특히 종금사들은 장기간 묶여 있는 리스자산을 담보로 외화채권을 발행해 해외 자금을 도입하는 ABS(자산담보부 증권)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새한종금 의 박덕수 이사는 “ABS를 통해 올해 안으로 5억달러를 도입할 계획”이 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용도가 괜찮은 기존 종금사 등 극히 일부를 제외 하고는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다.

국내 금융기관들의 외환대란의 원인은 근본적으로는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막대한 부실이 쌓인 데 있다. 은행권 여신이 2천5백억원 이상인 대기업으 로 올 들어 법정관리나 화의를 신청한 기아 등 10개 기업에 빌려준 금융 권 여신은 총 26조원을 넘고 있다. 이중 은행은 15조원 이상이 물렸는데 절반에 가까운 7조원 이상이 담보가 없는 것들이다. 종금사가 물린 금액 은 7조3천7백억원으로 은행보다는 작지만 자기자본이 1천억원도 안 되는 소규모 회사가 상당수인 종금업계로서는 타격이 훨씬 크다. 그나마 담보 가 없는 것들이다. 지난 6일 종금업계가 해태에 1천5백억원의 추가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도 해태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해태가 법정관리 나 화의로 들어갈 경우 원금은 물론 이자도 상당기간 못받아 부실이 더 커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원화부문은 사정이 낫다. 정 안 되면 막말로 한은에서 돈을 찍어 내는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임시변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외화부문은 한쪽 으로 해외 금융기관들이 대출금을 회수해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추가 해외 차입이 안 되는 형편에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 인 한은도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원화 환율 급등에 대처하는 것만도 숨이 차다. 한은의 외환보유고는 국제통화기금의 권고치인 3백60억달러를 훨씬 밑돌아 지난 10월 말 현재 3백5억달러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11월 들어 잇단 외환시장 개입으로 상당 부분 소진해 실제 외환보유고는 3백억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국내 금융기관, 더 좁혀서 종금사들이 외화부문에서 부도를 낼 경우 그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종금사의 한 임원은 “일반 기업들의 부도와 는 달리 엄청난 후유증이 나타날 것”이라면서 “특히 금융기관은 예금을 받은 고객들과 대출을 해 준 기업들이 서로 물려 있는 데다 전반적인 한 국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달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실 종금사 인수시켜야”

이를 잘 알고 있는 외환당국도 시장안정을 위해 온갖 방안을 강구하고 있 지만 현실적으로 마땅한 대책이 없는 형편이다. 한은은 최후의 사태에 대 비한 비상계획을 마련해 놓는 한편으로 매일매일 금융기관의 외환수급 사 정을 점검하고 있다. 오후 6시까지도 자체적으로 외화를 조달 못하는 종 금사가 나오면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나은 은행들을 동원해 해외 외환시장 에서 달러를 일괄 조달하도록 한 뒤 이를 분배하는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하루살이를 무한정 계속할 수 없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외환대란에 직면한 종금사들에 특단의 조처를 강구해야 한다는 목 소리가 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국내 금융기관 외화차입금의 60% 정도 를 공급하고 있는 미국 및 유럽계 금융기관들이 12월 말 결산을 앞두고 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을 나타내는 BIS비율을 높이기 위해 앞으로 더욱 해외자산 회수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아 외화대란이 쉽게 해결될 기 미는 보이지 않는다. 금융계가 제시하는 한 가지 방법은 부실 종금사의 경영권을 신용이 우수한 은행이나 대기업에 인수시키는 것이다. 금융계에 서는 정부가 이미 몇몇 은행과 기업들에 인수의사를 타진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종금사의 사주들이 경영권을 쉽게 내놓겠 느냐는 데 어려움이 있다. 다른 한 방법은 문제가 되는 종금사의 외환업 무 인가를 취소하는 것이다. 대신 이들 종금사의 외화 자산과 부채를 모 두 국책은행 등이 인수토록 하는 것이다.

정부당국도 국내 금융기관에만 맡겨 놓을 땐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재경원은 종금사 외환위기의 근본원인이 외국에서 만기가 짧 은 단기자금을 빌려와 리스 등 장기자산으로 운영하는 이른바 ‘기간 불 일치’에 있다고 보고 있다. 또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구노력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불신감이 높다. 외환당국의 한 관계자는 “지난 10월중 일부 은행과 종금사들이 국제 브로커들의 제의를 받고 외화자산을 러시아 등 위험도가 높은 지역에 투자했다가 상당액을 물렸다”면서 “똥은 자기 들이 싸놓고 우리더러 치우라는 꼴”이라고 말했다.

재경원이 종금사의 부실화 정도에 따라 경영개선 명령, 유상증자 권고, M &A 권고, 영업일부 제한, 영업정지 등을 취하는 ‘조기시정장치’를 조기 도입하는 방안을 강구중인 것도 이런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현재 재 경원이 마련중인 추가 금융시장 안정대책에는 부실채권 정리기금을 10조 원 선으로 대폭 확대하는 등의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 려졌다. 재경원 고위 관계자는 지난 11월8일 “앞으로는 대증적인 처방보 다는 시장경제원리에 충실하고 국제규범에도 부합하는 내용이 될 것”이 라고 말했다. 결국 대기업들의 연쇄부도에 따른 부실누적에 이어 외화대 란이 금융기관의 빅뱅을 앞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0일 제 183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