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문화

한·일 문학인들 혼돈을 껴안은 문학의 연대

(사진/한·일 작가회의에 참가한 두나라 문학인들. 세기말의 문학에 대한 토론을 통해 문학적 고민을 나눴다.)

한·일 두 나라 문학인들이 서로의 문학적 고민을 나누고 공통의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제4회 ‘한·일 작가회의’가 지난 11월3∼5일 경북 경주 에서 열렸다. 경주 보문단지 호숫가에 자리잡은 힐튼호텔에서 열린 이 회 의에는 한국에서 평론가 김병익 김주연씨, 소설가 오정희 김원우씨, 시인 이태수 이성복씨 등 20여명이, 일본에서도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과 가와 무라 미나토, 소설가 시마다 마사히코 등 역시 20여명이 참석해 진지하고 도 흥미로운 토론을 벌였다.


일본 표기법의 천황제 구조 비판

지난 9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한·일 현대 문학의 형성과 전개’ ‘후 기산업사회에서 문학의 위상’ 등을 주제로 제1회 대회가 열린 이래, 93 년 9월 제주(‘한·일 양국 문학에서 진보주의 사상의 동향’ 등), 95년 11월 일본 마쓰에(‘가족, 개인’ 등)를 오가며 작품 낭독과 토론을 벌인 두 나라 문인들은 올해의 주제로 ‘세기말:변화하는 시대에서의 문학’을 내걸었다. ‘언어 변화와 문학’ ‘윤리 변화와 문학’ ‘미디어 변화와 문학’ 등 3개 소주제로 나눠 발표와 토론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회의에 서 두 나라 문인들은 문학 안팎에서 진행되는 급속한 변화가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리고 그에 대한 문인들 자신의 대응은 어떠해야 할지를 집중 논의했다.

이번 회의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일본 최고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문자의 문제’라는 발표였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그리고 한자를 섞 어 쓰는 일본 표기법에서 일본 민족의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낸 이 발표는 이 일본 지식인의 다양한 관심과 깊이있는 사유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가 라타니는 우선 외래 기원을 갖는 말들이 고유의 일본어라 할 히라가나와 구별되는 한자나 가타카나로 표기됨으로써 그 외래성을 끝내 벗어던지지 못하는 일본 특유의 표기법에 주목한다. 그같은 표기법이 어떠한 외래 사 상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내면화하지는 않는 일본 사상의 탈중심성과 잡 거성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곧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체계’ 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명명한 ‘천황제 구조’라는 것이다.

결국 지난 95년 회의에서도 당시 한·일 두 나라 사이에 긴박한 현안이 되었던 ‘천황’의 전쟁 책임을 강도높게 추궁한 가라타니는 이번 회의에 서도 다시 한번 ‘천황’과 일본 전체의 비양심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는 나아가 일제강점기 일본 출신의 조선문화 연구자인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서도 “그는 이민족의 지배와 억압이라는 정치적·도덕적 측면을 괄호쳐버린 채 조선을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만 국한시켰다”며 “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일본판”이라고 비판했다.

가라타니의 발표가 진지한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면, 나머지 발표는 좀더 흥미있고 활발한 토론을 유발했다. 시인 이성복씨와 소설가 김원우씨가 각각 욕망과 성 도덕의 변화가 문학과 맺는 관계를 천착했는가 하면, 시 마다 마사히코는 프로이트가 타나토스라 부른 죽음과 파괴에의 충동의 문 학적 수용을 논의 주제로 삼았다. 또, 소설가 하재봉씨는 컴퓨터통신과 가상현실 등 현대 기술문명의 발달이 문학에 가져올 변화에 주목했다.


세미나 형식에서 소규모 자유토론으로

이성복씨의 ‘욕망으로서의 삶-문학론’에 대해 김주연씨는 “욕망의 승 인뿐만 아니라 그것의 승화 내지는 성화에도 문학은 애써야 하는 것 아닌 가” 하는 지적을 내놓았고, 일본의 여성 소설가 나카자와 게이 역시 “ 윤리의 해체와 파괴만을 계속하다가는 과연 무엇이 남겠느냐”며 “근래 일본에서는 그같은 무조건적 해체 움직임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고 있 다”고 소개했다. 컴퓨터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진화에 따른 문학의 소 멸 내지는 근본적 변화를 예측한 하재봉씨의 발표에 대해 소설가 이순원 씨는 경험을 바탕으로, 평론가 우찬제씨는 이론적 측면에서 각각 강력하 게 반발했다.

두 나라 문인들은 공식 회의가 끝난 뒤 저녁과 술자리에서도 진지하고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술자리에서는 얼마 전 있었던 한·일 국가대표 축구 경기 결과를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한편, 회의 마지막날 김병익씨와 가 와무라 미나토 등 양쪽 실무 대표들은 이제까지의 세미나 형식을 버리고, 좀더 소규모의 게릴라적이지만 심도 높은 자유토론쪽으로 방식을 바꾸기 로 했다고 밝혀 이 회의의 변신을 예고했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문화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0일 제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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