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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미래, 정보화에 달렸다

(사진/인터넷은 노동자의 국제연대를 이룰 것인가. 서울국제노동미디어 참가들은 인터넷 접속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

정보화사회는 지구촌 노동자의 미래를 약속할 것인가.

인터넷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보장하는 ‘정보접근의 보편성’을 추구한 다. 하지만 전지구적 정보화는 일부 국가와 초국적기업의 상업적 목적에 종속되는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자본의 논리가 정보를 상품화하기 때문 이다. 지구적 정보공동체의 가능성은 정보기술의 발전과 확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보통신은 자본의 국제화를 열어가는 첨단기술이다. 초고속 정보고속도 로는 자본의 국제적 흐름을 뒷받침하고, 선진자본주의 기술을 강매하는 두 가지 효과를 얻는다. 그래서 미국은 2015년까지 국가정보기반(NII)을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이 자국을 중심으로 정보고속도로를 구축하며 범유럽 통신망(TEN) 을 세우고 있다. 일본도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투자를 신사회자본으로 분 류해 아시아지역 통신망 건설에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다.


일하는 사람 볼모로 무차별 경쟁

전세계의 정보화물결이 세계경제의 재편구도와 맞물려 추진되는 가운데 정보화시대는 무차별적인 경쟁을 낳고 있다. 공기업의 민영화, 복지정책 의 축소는 물론이거니와 첨단산업의 육성·공장자동화 추진 과정에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에 휘말리는 것이다. 자본의 원활한 흐름을 위 해 개발된 정보통신기술이 일하는 사람에 대한 감시와 통제장치로 작용한 때문이다. 정보화사회의 스타들인 다니엘 벨, 앨빈 토플러, 앨 고어 등은 자본주의 위기를 은폐시킨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들이 자본가들에게 유연적 대량생산을 내세우며 노동자 해고를 부추기고, 리엔지니어링·임 시고용 등을 통한 노동강도 강화와 노동조합 약화 등을 정당화한다는 것 이다.

‘노동운동과 미디어-노동자, 정보기술 그리고 연대’를 주제로 지난 11 월10일부터 13일까지 연세대에서 열린 ‘서울국제노동미디어 ’97’은 자 본의 정보화·세계화운동에 대응하는 국제노동운동의 대응전략을 모색하 는 자리였다. 자본이 축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동화기술과 통신기 술을 업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정보화사회에서 노동운동의 가능성을 점검한 것이다. 국내 20여개의 노동·학술·영상 단체가 공동으 로 조직위원회(공동대표 김진균·고영구)를 꾸린 이 행사에는 미국·영국 의 레이버넷(LaborNet)과 국제노동자영상네트워크 비디아지무트(Videazim ut) 등의 관계자와 함께 10여개국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정보화사회에서 전자통신기술 발전이 노동자의 삶의 질과 노동운동에 미 치는 영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참가자들은 노동운동의 조직화·교육 , 국제연대 활성화를 위한 인터넷·비디오·라디오 등 커뮤니케이션 수단 의 활용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김진균 집행위 원장(서울대 사회학과)은 “노동자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정보화사회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아 실천적인 방안을 모색했다”며 전세계적 규모에서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심화되는 가운데 노동자끼리의 의사소통, 국제적인 의사소통이 더욱 절박한 현안으로 떠오른다고 밝혔다.

자본의 세계화·정보화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에 대한 독점자 본으로 규정한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과학기술 혁명은 생산에서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노동자들을 로봇과 같은 자동화 기계시스템으로 대체하고 있음 을 주목해야 한다”며 정보화혁명이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의 필요를 위해 이용되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게 노동자의 과제라고 주장 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가들의 통제장치는 노동자들의 머리와 손에 장악 돼 있다. 노동자들이 정보화시스템을 개발한 주역이기에 자본의 이익에 대항해 독립적인 통신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쪽에서 음 란·폭력 등을 구실로 억압과 검열을 일삼는지 모른다. 최근 우리 정부가 북한에 관련된 자료가 있다는 이유로 1천만개 이상의 홈페이지가 있는 ‘ geocities’에 대한 접속을 봉쇄한 조처도 자유로운 정보화사회의 어려움 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하겠다.


정보화사회에서 변혁의 가능성 찾는다

(사진/미국의 노동자 네트워크인 `레이버넷'을 만든 스티브 첼처. )

정보사회에 대한 환상은 사회진보에 대한 믿음을 희석시킨 게 사실이다. 피시(Personal Computer)를 ‘피할 수 없는 시련’으로 여기며 정보화가 사회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질문은 머릿속에 들어설 틈조 차 없는 것이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주술에 빨려들었기 때문이 다. 강수돌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부소장은 정보기술 혁명 자체를 혁신 적으로 다르게 이끌어나가는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정보기술이 개발되 어 적용·확산되는 사회적 맥락과 관계를 주목해 자본의 지배가 강화되는 과정을 일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자본의 국제화에 의존하는 정보화기술이 자본뿐만 아니라 노동단체들의 국제화를 앞당기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범지구적으로 구축되고 있 는 정보통신망을 활용해 기업별 운동의 틀에서 벗어나 업종·산업별로 묶 고, 나아가 범지구적 연대의 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노동자 네트워크인 레이버넷은 2백50여개의 미국 내 연맹노조와 국제노동단체· 각국의 연맹노조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영국의 레이버넷은 각국의 투쟁소식을 전파해 국제연대를 조직하고 있으며, 캐나다 공공노조에서 만 든 솔리넷(SoliNet)은 4백만 조합원을 묶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자리잡았 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생존권을 위협받는 멕시코 자파 티스타 농민군은 미국 내 대학의 인터넷을 통해 세계적인 관심과 연대를 모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를 반대하는 총파업 때 ‘총파업통신지원단’이 결성돼 인터넷과 컴퓨터통신을 활용해 30여개 나라의 노동·정치단체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미국의 레이버넷을 93년에 만든 스티브 첼처는 인터넷이 초국적자본에 대 항하는 노동의 세계화를 실현할 것이라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노동운 동이 ‘지구적 조합주의’(Global Unionism)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노동커뮤니케이션의 연계망을 가져야 한다. 세계 곳곳의 다국적기업 노동자들이 회사차원의 홈페이지를 개발해 서로 연결하면 중요한 활동수 단이 될 것이다. ‘자본에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 ‘노동자에게 국경이 없다’는 구호를 내세워야 한다.”


인터넷으로 지구적 조합주의 실현

세계적으로 40여개 나라에서 노동자네트워크가 구축되어 단일한 네트워크 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지만 현재의 미디어 독점을 막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상황이다. 에이피, 유피아이, 로이터 등 다섯개 통신사가 전세계 뉴스의 90%를 독점하고 아이비엠, 시어드 등 몇개 회사가 비디어텍스 시장을 장 악한 상황에서 정보의 다양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본이 정보를 왜곡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각국의 노동자네트워크는 새로운 미디 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50여개에 이르는 노동케이블프로그램이 있다. 시카고의 케 이블방송채널인 레이버 비트(Labor Beat)와 샌프란시스코의 레이버 비디 어 프로젝트 등의 독립적인 노동비디오 단체와 함께 지역노동조합이 지원 하는 노동관련 케이블방송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스티브 첼처는 “노동비 디오는 미국과 국제적 자본의 반노동자적인 공격으로부터 노동조합을 지 키는 유력한 수단이다. 미국의 노동비디오 제작자들은 같은 기업에서 일 하는 노동자들과 연대를 도모하고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테이프를 세계 각국에 보급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노동비디오 배급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제 노동비디오 협력프로그램으로 만든 ‘올 포 원’(All For On e)은 부두노동자들의 파업과정을 3개 대륙에서 동시에 제작했다. 이 비디 오는 5백명이나 해고당한 영국 리버풀 노동자들의 싸움이 단지 리버풀만 의 문제가 아니라 민영화와 탈규제 그리고 조합파괴에 직면한 전세계 부 두노동자 모두의 문제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은 오는 98년부터 노동 자 케이블채널을 마련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도 80년대 초 반부터 시각매체를 활용하기 시작해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다양한 교육비 디오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올해 1월 총파업 때 통신지원단이 제작한 속보프로그램은 민주노조의 연계망을 통해 광범위하게 배포되기도 했다.

노동비디오 제작과 국제적 규모의 라디오프로그램도 멀지 않아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중심의 새로운 미디어는 노동자신문과 온라인 뉴 스레터 등과 함께 노동운동의 국제적 역량을 높일 수 있지만 인터넷 유료 화 논란의 추이에 따라 그 가능성이 판가름날 전망이다. 인터넷 서비스 유료화가 이뤄진다면 정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따라 실효성을 잃어버 리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국제연대를 위해 인터넷을 활용하겠다는 발상은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이뤄졌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대중화되지 않아 초보적인 구상만 진행되다 90년대 들어 비로소 컴퓨터와 인터넷이 노동자들에게 보급되면 서 노동운동 전문가들과 피터 워터만 등의 학자들에 의해 구체적인 전망 이 세워졌다. 이번 노동미디어에서 인터넷을 통한 국제연대 강화에 뜻을 모으고 온라인 상에 노동운동 세력의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사 등의 현실 화 방안을 모색했지만 국제 레이버넷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한두가지가 아 니다.


새 미디어에도 관심… 비용·언어의 문제

<노동운동과 인터넷>이라는 책자를 펴낸 이스라엘의 에릭 리는 인터넷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전제조건으로 비용과 언어 문제를 꼽았다. “광대역의 통신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빠른 네트워크 접속이 가능한데, 현재 는 네트워크 컴퓨터마저도 갖추지 못한 실정이다. 네트워크에서 영어의 지배를 극복할 방안을 찾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운영자들이 자동번역프 로그램을 개발해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모국어로 자유롭게 네트 워크에 접근해야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지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정보화사회는 여전히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노동운동의 네트워크가 대륙 별 한계를 넘어 국제적 질서를 수립하는 것은 이제 시기 문제일 뿐이다. 자본의 국제화가 이뤄지면서 각국 문제는 지구화의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이번 노동미디 어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첫출발이었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0일 제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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