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과학의 영웅을 생각한다

(사진/노벨상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에도 아직은 희망일 뿐이다. 노벨상 수상은 과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더욱 확대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가 모두 발표됐다. 월드컵 열기 덕분인지, 대통령선거 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경제난국 탓인지, 또는 평화상이 지뢰금지운동단 체와 운동가에 수여된 사실이 우리 정부를 난처하게 만든 것이 원인이 되 었는지, 아니면 해마다 되풀이되는 행사에 식상할 때가 돼서 그랬는지 언 론에서 다루는 정도가 예년보다는 훨씬 덜한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을 우 려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 한다.

노벨상이 현대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올해 물리학상 수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처럼 수상 자 선정에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물리학, 화학, 의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대개 선정위원들의 견해 탓으로 치부되지 선정과정 의 부정이나 불공정성이 문제되는 적은 별로 없다.

수상자 선정에 대한 논란을 수상자들이 멋지게 극복한 경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가지 미담을 들어보자. 1923년 노벨상위원회는 1921 년 말에 인슐린을 발견한 학자들에게 의학상을 주기로 결정했다. 노벨상 은 타당한 업적을 세운 지 적어도 몇해, 길게는 몇십년이 지나서 시상하 는 것이 상례다. 인슐린 발견의 경우처럼 두해도 지나지 않아 시상하는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만큼 그 업적이 의학적으로나 사회적 으로나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이 적절한 것이었음은 후대 역사가 잘 말해준다. 그러나 노벨상위원회가 수상자로 밴팅과 매클리오드를 선정함으로써 논란이 일어났다. 연구기간 내내 밴팅 과 더불어 일함으로써 업적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베스트와, 임상적으 로 안전하고 유용한 인슐린을 분리해낸 콜립이 제외된 대신 실제 발견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는 매클리오드를 선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상자 들과 역사는 노벨상위원회보다 훨씬 현명했다. 밴팅과 매클리오드는 수상 의 영예와 상금을 각각 베스트와 콜립과 나누었으며, 역사는 그들 모두의 공헌을 제대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벨상 수상자라는 영웅의 탄생을 고대하는 심리는 스포츠나 영 화에서 스타를 바라고 그들에게 환호하는 것이나 비슷할 터이다. 특히 이 른바 약소국이나 후진국에서 그러한 스타나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메시아 기대 심리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들을 통해 카타르 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현상 을 예컨대 일제시기 손기정에 대한 열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스 타와 영웅들이 해당되는 분야의 관심과 참여와 발전을 이끌기도 한다. 필 자는 지난달 열린 춘천국제마라톤대회에서 이천명에 가까운 아마추어들이 풀코스와 하프코스에 도전하여 거의 대부분 완주한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마 황영조나 이봉주 같은 걸출한 선수가 나타남으로써 그러한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보다 열배가 넘는 아마추어들이(신청자가 너무 많아 일정한 기록에 달해야 출전할 수 있다) 참가하는 뉴욕마라톤 등도 프랭크 쇼터 같은 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아 마추어들의 관심과 열기 속에서 마라톤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경우 국민들은 월드컵 본선 5회 연속 출전이나 올림픽 4위 입상,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의 수상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광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듯 보이 는 엽전의식이나 민족열등감 따위는 말끔히 씻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상 분야가 과학일 경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한껏 고조되고, 어 린이들의 으뜸가는 소망도 제2의 박찬호에서 노벨상 타는 과학자·의학자 가 될 것이다.

필자는 노벨상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지금보다 더 확대되고 증가해야 한다 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과학에 대한 맹신이나 나아가 과학을 절대화·신비화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은 과학적 의학이 가장 발 달했다는 미국, 노벨의학상을 계속 휩쓸다시피하는 미국 국민들이 가장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명확하다. 요컨대 필자는 터무 니없는 반과학적 태도와 더불어 과학맹신론 역시 반과학적임을 지적하고 싶다.

황상익/ 서울대 의대·의학사 및 의료윤리학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