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독자편지

만리장성에서 조국을 떠올리며

나이 마흔을 넘어 만리장성에 올랐다. 중국인의 웅장한 스케일과 엄청난 저력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동쪽의 한반도를 바라보았다. 동강난 국토가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동강난 허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우 리 민족. 갈라진 지 50년이 넘었는데도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동강난 아 래의 좁은 땅덩어리를 또 나누어 편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 북녘 땅에서는 많은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배에 기름이 끼어 고민하 면서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 남녘 동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는 근엄하게 부르면서 통일을 외치는 사람은 옥살이를 하고 있는 저 기 우리 땅.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 이 땅에는 세계 역사에 남 을 영웅호걸이 수없이 많은데 저기 저 땅에는 왜 영웅호걸이 나오질 않는 걸까. 아니 있는데 그냥 파묻히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영웅호걸이 아 예 나올 수 없게 싹을 자르는 그 무엇이 있는 걸까.

며칠 내내 베이징호텔의 에서는 장 주석의 미국 방문을 보도하느라 하루종일 법석을 떨고 있다. 빨간 양탄자를 깔고, 21발의 축포를 울리며 미국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갖추어 극진히 대접하고 있지 않는가. 미국 그 넓은 땅덩어리가 온통 붉은 오성기로 뒤덮여 있다. 나의 질투가 불처럼 타오른다. 그걸 보며 얼마 전 우리의 대통령이 구걸하다시피해서 미국을 방문한 것이 생각났다. 남의 나라 대통령은 저렇듯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으며 방문하는데 우리의 대통령은 난색을 표하는데도 외교관례 를 무시해가며, 외교관을 총동원해 억지 방문을 기어코 성사시키니…. 외 교 행태에도 땅덩어리 차이가 나는가 보다.

지금 우리 주위는 얼마나 바삐 돌아가고 있는가. 미·중에 이어 러·일까 지 한때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나라들이 지금처럼 바삐 움직인 적 이 없었다. 1백년 전 주위의 열강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우리나라를 유 린했던 것처럼. 마치 한반도 남쪽의 대선을 거사 일로 잡은 듯하다. 그런 데도 저기 저쪽 땅에서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 다. 제 운명도 모르고. 우리는 과연 지금의 이 상황을 제대로 읽고 헤쳐 나갈 능력이 있는가.

TV뉴스에 코리아가 나왔다. 외국방송에 우리나라가 등장하는 것은 불길하 다. 우리 잘되는 일을 외국방송이 떠들어댈 리 만무이기 때문이다. 아니 나 다를까, 아시아지역의 다음 금융붕괴 조짐이 한국에 있다고 한다. 불 현듯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사람들이 미워졌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못 배 운 사람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잘못 배운 자들이 많아 망친 나라라는 생 각이 들었다. 구한말 이래 나라를 망쳐놓은 것이 이른바 배운 자들이었다 . 알량하게 배운 것을 제 한몸 위하자고 구부려 나라를 망친 것이다. 지 금도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이 이른바 알량한 지식인들이다. 그나 마 배운 것 없는 힘없는 백성들이 항상 역사의 바른쪽에 서서 지켰기에 이렇게나마 지탱을 하는 것이리라.

여인철/ 대전시 유성구 장동 23-7 한국선급 책임연구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0일 제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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