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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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오후 2시, 서울 세운상가의 청계천쪽 계단. 그곳으로 다가서자 2 0대 청년 2명이 따라붙는다. “아저씨 테이프 하나만 봐요. 쇼킹한 거 새 로 나왔어요.” 다짜고짜 팔짱을 끼고 함께 걸으며 말을 붙인다. 짐짓 냉 담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찰거머리같다. 못이기는 척하며 청년 한명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0.5평 남짓한 허름한 사무실에는 책상과 의자 하나만 달랑 놓여 있다. 칠판엔 ‘아침 출근 시간을 제대로 지키자’는 구호가 적혀있었다. “사제 포르노라고 들어보셨어요?” 청년이 미소를 띠며 은근히 묻는다. “모르겠는데요.”
“5백만원만 내세요”
청년의 친절한 설명이 즉각 이어진다. “그게 6개짜린데요, 죽여줘요. < 빨간 마후라>, 탤런트 ㅇ아무개씨 비디오, ㅅ여대 화장실 몰카(몰래카메 라), 신혼부부 몰카는 필수로 넣어주고 원판으로 2개 더 줘요.” 가격을 물었다. “5백만원만 내세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일어서려 하자 청년이 다시 팔을 붙잡아 앉힌다. “화질이 좀 떨어지는 것으로 선택하면 3백만원까지 해드 릴 수도 있어요.” 10여분 동안의 승강이 끝에 가격은 1백50만원까지 내 려갔다. 그러나 청년의 손을 뿌리치고 나왔다. 돈이 없다는데 청년도 어 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청년은 핸드폰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며 “생각이 바뀌면 꼭 연락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마추어가 몰래카메라나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로 찍었다는 포르노 비디오 가 지하유통시장에서 고액으로 팔리고 있다. <빨간 마후라>는 사건이 끼 친 사회적 파장 때문인지 지하시장에서 인기가 더 높아졌다. 여기에 탤런 트 ㅇ아무개씨의 전화통화 내용 등 가정생활을 촬영했다는 비디오와 한 여대의 화장실을 몰래 찍었다는 비디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 신혼부부 의 첫날밤을 찍었다는 비디오까지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빨간 마후라>는 여중생이 출연한다는 점 때문에 '높은 상품가치'를 인정 받아 수요층이 줄지 않고 있다. 화질이 비교적 깨끗하고 촬영기술이 수준 급이라는 점도 인기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인기 여배우 ㅇ아무개씨의 비디오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 고 있다. 본인은 여러 차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어쨌든 비디오의 내 용은, 이 여배우가 집안에서 속옷차림으로 전화통화를 하는 등의 장면들 로 구성돼 있다. 여배우가 지닌 빼어난 미모와 인기로 인해 이 비디오는 화제를 뿌리며 포르노 비디오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배설장면 담은 변태비디오도
한 여대(ㅇ여대라는 주장과 ㅅ여대라는 주장이 맞서 있다)의 화장실 내부 를 찍었다는 몰래카메라 비디오는 여대생들의 배설장면을 담았다는 것. 당연히 '변태 경향'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비 디오는 관음증 문화가 일상화한 일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몰래카메라 필름을 국내로 들여와 우리나라 여자대학의 모습을 촬영한 부분과 짜깁기 해 편집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혼부부 몰래카메라 포르노'라고 불리는 비디오는 신혼부부가 자신들만이 볼 목적으로 첫날밤을 찍어놓은 필름이 실수로 흘러나와 유통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이 비디오는 종류도 많다 . 실제로 이 비디오들은 기술적으로 아마추어 티가 줄줄이 흐르고 편집도 거의 안된 생필름인 경우가 많다. 또 얼굴이 그대로 나오는 점으로 미루 어 시장에 유통시킬 목적으로 촬영했다고 보기 어렵다. 비디오의 주인공 들이 진짜 신혼부부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비디오들은 현재 컴퓨터 통신공간에서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컴퓨 터통신란의 물건구입란을 보면 위에 열거한 비디오들을 제시하며 2∼3개 에 몇 만원씩을 요구하고 있다. 통신이용자들은 이 비디오들을 압축파일 형태로 주고받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CD-ROM 타이틀 형태로도 은밀 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귀띔했다. 방송업계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는 “방송 영화 등 영상업계에서는 하청업체나 협력업체 사람들에 대한 로비 나 접대용으로 이런 테이프들이 필수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전했다.
‘캠코더’(카메라 일체형 녹화기, CAMCORDER:카메라+리코더)라고도 불리 는 가정용 비디오카메라의 대중화는 이제 한국에서도 아마추어 포르노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보급된 캠코더의 영향력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영상물 제작 욕구가 강한 아마추어들의 희망을 상당부분 해결해주었 다. 이 욕구에는 물론 자신의 벗은 모습이나 부부생활 장면을 기록해놓고 싶다는 것도 포함된다. 회사원 김아무개(37)씨는 첫아이를 가졌을 때 자 신의 알몸을 찍고 싶은 생각이 들어 남편을 시켜 비디오를 찍게 했다. 처 음에는 쑥스러웠지만 한번 찍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부부만 보기로 한 것이라 다른 이들이 볼 염려도 없어 촬영에 대 한 거부감도 그리 크지 않았다. 김씨는 지금도 가끔씩 이 비디오를 본다. 임신한 여성의 알몸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또 요즘 신혼부부들 가운데는 김씨의 경우와 같이 캠코더로 자신들의 침실 장면을 찍어 단둘이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서로의 사랑을 확 인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비디오 찍어주는 러브호텔
사실 출연자만 보는 것이라면 변태건 관음증이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별로 없다. 그러나 이윤을 목적으로 유통될 경우엔 문제의 차원이 달라진다.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 러브호텔 에서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비디오카메라 설치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 다. 실제로 인천의 한 지역에서는 여관들마다 천장에 비디오카메라를 설 치해놓고 투숙객들의 장면이 TV화면에 비칠 수 있도록 해놓았다고 한다. 손님이 원하면 이 녹화테이프를 가져갈 수도 있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마추어 포르노 제작인 셈이다.
그런데 이 테이프들을 업소 주인들이 다른 목적에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 까.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며 시중에 유통되는 이른바 '신혼부부 포르노'도 이런 경로로 유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범 죄가 늘어나는 현상도 아마추어 포르노의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 여관방 에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고 나중에 테이프를 미끼로 협박을 하는 등의 범죄나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화장실 몰래카메라 사건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 아마추어 포르노 비디오 유통이 본격화하는 것이 아 니냐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한 전문가는 “겉으로는 포르노에 대해 관심 이 없는 것 같지만 상당수의 부부들은 대부분 포르노 비디오를 침실에서 즐기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포르노는 합법화되지 않았을 뿐 대부분의 어 른들이 일상적으로 은밀히 이용한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포르노에 식상 한 이들이 아마추어 포르노에 쏠리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잘라 말했 다. 그는 또 “앞으로 본인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이뤄지는 아마추어 포르노의 유통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매춘산 업의 과잉발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는 포르노산업이 ‘표현의 자 유 확대’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린다면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각을 과잉 우려로 보는 견해도 많다. 출판기획가 정철영씨는 “최근 현재 유통되는 비디오들은 전문 포르노 프로덕션이 만들지 않았다 는 점에서는 아마추어 포르노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아마추어 포르노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는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추 어 포르노는 포르노의 공급과 유통이 자유로워진 뒤에 사회구성원들의 성 적 취향이 극도로 다양해지고 개별화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직 아마추어 포르노를 확산시킬 정도로 사회적 기반이 형성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적 욕망의 개별화와 개성화가 극도로 진전 되고 성적 적극주의가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로 자리잡을 때 아마추어 포르노는 비로소 대중화할 수 있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한국인의 정 서적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이 제작한 <빨간 마후라>는 이런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초상권 등 인권침해 논란 일듯
한편 최근 떠돌아다니는 아마추어 포르노는 비디오를 찍은 당사자들의 의 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로 유통되고 있어 초상권 등 인권에 대한 침 해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아마추어 포르노의 공개 여부는 철저하게 당사자의 약속과 동의를 전제로 해야 한다. <빨간 마후라> 출연 학생들의 도덕적 불감증도 문제지만 이를 불법 유통시킨 '장사꾼'들으 더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범람’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일상화한 미국의 아마추어 포르노 유 통시장에서도 다음의 사항은 엄격하게 규제한다. △남의 침실을 창문 너 머로 몰래 찍는 것 △미성년자나 동물을 등장시키는 것 △성폭력적 행위 나 배설장면 등이 그것이다. 아마추어 포르노의 제작방침까지 상세히 설 명한 가이드북까지 내놓고 있다. 한국도 이제 아마추어 포르노 시대를 준 비해야 할 때가 온 것일까.
김창석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20일 제 1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