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사위가 먼저냐 형제가 먼저냐

고인이 된 장인의 재산을 사위가 홀로 상속받을 수 있을까? 그것도 고인 의 형제들이 살아 있고, 사위는 아내와 자녀가 없는 혈혈단신인데…. 지 난 90년 2월 민법이 개정된 뒤 처음으로 이 문제가 법원의 판단에 맡겨졌 다. 현행 민법에 따르면 다른 집안에서 들어온 사람이라도 고인의 배우자 나 며느리는 재산 일부를 상속받을 수 있다. 하지만 90년 민법개정 전까 지는 사위의 상속권에 대한 규정은 아예 없었다. 개정 민법이 남녀평등권 을 강화하면서 며느리만을 뜻하던 “처”라는 표현을 “배우자”로 바꿈 에 따라, 사위도 며느리처럼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느냐가 논란거리로 등 장하게 된 것이다.

사위상속권 논란 전례 없어 의견분분

사태의 발단은 지난 8월 1천억대의 재산을 가진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 이 성철(68·서울 강서구 목동) 회장이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로 사망하면 서 비롯됐다. 이 사고로 이 회장의 부인(송병원·62), 아들(경한·32)과 며느리(박소현·28), 손녀(주희·3), 그리고 이회장의 딸(혜경·34)과 2 명의 외손자까지 일가족 8명이 모두 사망하면서 1순위 상속권자인 직계비 속과 배우자가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음 순위 상속권자로는 이 회장의 남동생 4명과 여동생 3명이 생존해 있지만 문제는 사위다. 당시 병원일로 바빠 여행에 동행하지 않아 사고를 면한 혜경씨의 남편 김희태(34·한양 대병원 신경과 전문의)씨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느냐 아니면 형제들이 상 속받느냐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상속재산의 규모는 만만치 않다. 6 ·25 당시 7형제와 함께 월남한 이 회장은 그동안 제일연탄과 인천제일신 용금고 등을 경영하면서 제일빌딩, 인천시 주안동의 3천여평의 부동산 등 자그마치 1천억원이 넘는 막대한 재산을 남겨놓았다.

민법은 상속의 우선순위에 대해 직계비속, 직계존속, 형제자매, 4촌 이내 의 방계혈족 순(1000조)으로 정하고 있다. 물론 한 사람이라도 선순위의 상속자가 있다면 후순위 상속자는 상속에서 배제된다. 민법은 또 직계비 속(예컨대 아들)이 피상속인(할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하더라도 그들 의 직계비속(손자녀)이 아버지의 상속지분을 상속(대습상속)받도록(1001 조) 하고 있어서, 김씨의 부인이나 자녀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애초부터 논란이 빚어질 소지는 없었다. 하지만, 민법은 직계비속의 배우 자에 대해서도 1003조 2항에 “피상속인의 직계비속이 상속개시 전에 사 망한 경우 그 배우자는 1001조의 규정에 따른 상속인(손자녀·외손자녀) 과 공동상속인이 되고, 상속인이 없는 때에는 단독상속인이 된다”고 규 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조항인데, 지금껏 사위의 상속권과 관련해 소송 이 벌어진 적이 없는 만큼 이 조항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밝혀줄 법원의 판례도 없다.

동시에 상속등기 신청 법원판단 구하기로

그동안 이 회장의 형제들은 세경합동법률사무소(공동대표 김창준 변호사) 를, 사위 김씨는 법무법인 율촌(대표 우창록 변호사)을 대리인으로 내세 워 9월 말부터 지난달까지 두차례씩 법해석 의견서를 주고받는 등 법정소 송을 피하기 위해 막후에서 치열한 법리논쟁을 벌여왔다. 법무법인 율촌 쪽은 “민법개정의 취지에 따르면 사위 김씨의 단독상속에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세경합동쪽은 대법원 판례 2건과 민법학 자 곽윤직 교수의 해석을 토대로 사위 김씨에게는 상속권이 없다고 주장 한다. 김창준 변호사는 “대습상속에 관한 민법 1003조 2항의 규정은 한 사람이라도 공동상속자가 있는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일가족 전 원이 사망해 공동상속인이 없어진 상황에서는 사위 김씨의 상속권도 인정 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1순위 상속자가 먼저 사망했을 경우에 그의 직계비속이나 배우자가 손해보는 상황을 막기 위해 대습상속제도가 있는 만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법취지에 맞다는 것이다.

형제들은 특히 이 회장이 살아 있는 동안 동생 경철씨와 재산다툼을 벌이 는 등, 이 회장의 재산이 혼자 모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91년 경철씨는 고 이 회장을 상대로 재산분할청구소송을 내 패소했지만, 이 회장이 재산을 분할하겠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항소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 까닭에 양쪽은 그동안 상속재산의 배분 비율에 대한 막후협상도 활 발하게 벌여왔다고 한다. 세경합동(형제자매)쪽은 형제 7명과 사위가 사 람수에 따라 공동배분하는 방안, 형제자매들과 사위가 7 대 3으로 배분하 는 방안, 형제자매들과 사위가 50 대 50으로 나누는 방안 등을 제시했지 만, 사위 김씨가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누가 법적인 상속권자가 되는 가에 대해 끝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했던 까닭이다. 상속재산을 반씩 나눈 다 하더라도, 법적 상속권이 없는 쪽은 상속세와 증여세를 내고 나면 상 속지분이 전체의 18%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씨쪽은 이에 앞서 지난 9월 자신이 재산을 상속받을 경우 “생전에 재 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수차례 밝힌 장인의 뜻을 받들어 상속재산을 모두 자선병원 설립 및 운영과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데 내놓겠다”고 밝 힌 바 있다. 일부에서는 상속권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나온 김씨의 이런 발언에 대해 언론플레이가 아니냐는 뒷말도 없지 않았 지만, 어떻든 김씨는 “고인의 뜻을 살리기 위해서는 형제쪽에서 내놓은 배분조건이 적절하지 못하다”며 결국 법원의 판단을 구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쪽은 정식소송보다는 일단 동시에 일부 재산에 대해 상속등기를 내기로 했다. 등기법상 절차에 따라 어느 한쪽의 신청이 수리되면 반대쪽이 법원 에 이의신청을 내는 간단한 방법을 택하자는 것이다. 정식재판은 시일이 많이 걸리는 데다, 제일금고의 고객들이 경영권 불안으로 예금을 인출하 거나 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양쪽은 지난 11월8일 이 회장의 자택( 서울 강서구 목동) 대지 1백50여평에 대한 상속등기를 강서등기소에 동시 에 신청했다. 물론 이같은 방식을 취하더라도 최종판결까지는 1심에 이어 항고-재항고 등을 거치면 최소한 1년은 걸릴 전망이다. 이에 대해 우창록 변호사는 “등기소가 법원행정처에 업무질의를 해, 그 결과가 나오면 어 떻든 1차 판단이 내려질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서로 협의해 소송을 멈추는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쪽은 또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어느 한쪽이 재산을 독식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법원의 최종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는 물론 아직 알 수 없다. 법조계에서 도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깊이있는 논의가 없었던 만큼 명쾌한 견해는 없다. 일반인의 법감정도 여전히 혼란스럽다.

재혼하면 인척관계 사라져 논란 여지

민법이 개정되기 전 유림에서는 “며느리가 재산을 상속받은 뒤 재가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며느리의 상속권도 폐지하라는 주장이 없지 않았 다. 그런데도 우리 민법이 남편을 먼저 잃은 며느리의 상속권을 인정하는 것은 남편없는 몸으로 시부모를 모신 데 대한 보상 성격이 짙다는 게 법 조계의 견해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시는 경우는 아 직도 많지만, 아내 잃은 사위가 처부모를 모시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 다. 사위가 재산을 상속받은 뒤 재혼하면 그뒤에는 고인과의 인척관계가 아예 사라져버린다는 점도 논란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쨌든 개정 민법은 며느리뿐 아니라 사위도 재산상속권자가 되도록 문구를 바꾼 것이 분명한 만큼, 개정민법에 담긴 구체적인 뜻이 무엇일지 법원의 판결이 궁 금해진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