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미군부대는 밀수품 창고?

(사진/미군부대를 빠져나오는 `에어리어 택시'. 출입이 자유로로워 미군PX물품을 불법반출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한겨레21> 취재진이 미군부대 구내매점(PX: Post Exchange)물품의 불법 유통 현장을 알려주겠다는 제보자를 따라나선 것은 11월6일 오후 6시30분 이었다. 장소는 대구시 남구 봉덕2동 속칭 ‘삼정골 빨래터’. 겉보기엔 여느 주택가와 다를 바 없다. 밤이 이슥해지자 드디어 ‘에어리어 콜’(A REA CALL)이라고 쓰인 택시가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온다. 30대 여성이 내려 주변을 살피더니 가정집을 향해 “언니!” 하고 소리쳤다. 집 안에 서 50대 아주머니가 달려나왔다. 택시기사가 트렁크를 열자 둘은 열심히 물건을 내려놓는다.

가정집에 진열대 만들고 버젓히 판매

맥주와 음료수 상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날이 어두워 다른 품목은 무 엇인지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트렁크를 가득 채울 만큼 양이 많았다. 택시 가 떠나기 무섭게 익숙한 몸짓으로 잽싸게 물건을 들여놓고 두 여인은 집 안으로 사라졌다. 10여분 뒤 50대 남성 한명이 대문을 열고 나섰다. 몇명 의 사람들이 더 집 안에서 나왔다. 나오는 사람들마다 두손에는 커다란 까만색 비닐봉지 2개씩 들려 있었다.

이곳은 몇년 전부터 불법으로 흘러나온 미군부대 물건을 소매상이나 개인 에게 대량 유통시켜온 중간유통상 구실을 해온 가정집이다. 이런 집에는 방 안에 선반을 놓고 미군부대 물품을 진열해놓는다고 한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팔지 않는 게 이곳의 철칙이다. 이런 중간유통이 가정집에 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근처 다른 가게를 찾아냈다. 이곳에서는 ‘삼양당’이라는 간판까지 걸어 놓고 미군물품을 팔고 있었다. 간판에는 전화번호도 없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선반에 진열해놓은 미군부대 물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7시가 되자 대구27 더5289 포텐샤 승용차 한대가 가게 앞에 섰다. 20대 청년 2 명이 가게로 들어갔다. 5분 뒤 가게에서 나온 둘은 트렁크를 열더니 박스 두개를 싣고 떠났다. 승용차가 떠나기 무섭게 대구80 라4027 프레지오가 달려온다. 승용차와 마찬가지로 이 봉고도 까맣게 선팅돼 차 안을 자세히 볼 수 없게 했다. 가게를 찾는 이들은 한결같이 가게로 들어서기 전 주위 를 한번 살폈다.

그뒤로는 봉고, 트럭, 택시가 계속 줄을 이었다. ‘문전성시’였다. 삼양 당에서 20여m 떨어진 ‘알로에’ 역시 같은 구실을 하는 가게였다. 이곳 앞에는 중년 5명이 서 있다가 들어가 불을 켜놓은 상태로 문을 안으로 걸 어잠궜다. 10분 뒤 늦게 도착해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듯한 중년여성 한명이 가방을 들고 가게에 들여가려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는 발길 을 돌렸다. 근처 수입화장품 가게와 가정집 몇곳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 물품유통이 이뤄졌다. 미군PX물품 암시장은 주택가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 었던 셈이다. <한겨레21> 취재진은 이날밤 모두 6곳의 중간유통처를 확인 했다. 모두 미군부대인 캠프 워커의 정문을 기준으로 해 반경 1km 안이었 다.

미군전용 택시로 반출물품 날라

(사진/재래시장인 대구 봉덕시장의 미군PX물품. 관세를 물지않아 가격이 싼 데다 세원추적이 되지 않아 징세 자체가 불가능하다. )

남구 봉덕동 재래시장인 봉덕시장 역시 불법유출된 미군PX물품의 유통현 장이다. 양주와 맥주 등 주류, 담배 화장품 애플파이 선키스트오렌지 과 자 초콜릿 리바이스청바지 등 없는 게 없었다. 골프채와 테니스라켓 등 상대적으로 비싼 물건들은 친한 손님들에게만 판다고 한다. 애플파이의 유통기한을 물었다. “유효기간 다 있어예. 먹고 죽는 건 안 팔어예.” 가게 여주인은 그러나 유통기한이 어디에 적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렌 지도 마찬가지였다.

수입원을 한글로 밝히는 표시가 있어야 정식 통관절차를 밟은 수입품인데 이곳의 물건들에는 대부분 영어설명 뿐이다. ‘아미 앤 에어포스 익스체 인지’(Army & Airforce Exchange)라는 문구는 부대에서 유출됐음을 입증 한다. 이 물품들은 비행기에 실려 미군부대로 직접 날아온다. 공식적인 통관절차를 밟지 않기 때문에 국세청이 매기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그래 서 애플파이는 6천원, 리바이스 청바지는 3만5천원 정도로 싸게 팔린다. 미군PX에서 팔리는 가격과 국내가격을 비교해보면, 대략 2∼10배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보자가 밝히는 물품유출의 구조는 이랬다. 예전에는 이른바 ‘지게’라 고 불리는 미군이 물품을 직접 빼내 한국유통업자들에게 넘기는 방식이었 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요즘에는 미군들이 직접 나 서기보다는 자신과 관련있는 한국인들을 통해 택시 등을 이용해 부대 밖 으로 빼내는 방식이 흔히 쓰인다. 이렇게 하면 통역책·위조책·판매책까 지 필요한 전문조직을 이용하지 않고도 불법유출이 가능해진다. 일반적으 로 미군과 국제결혼한 한국여성들이 불법유출을 도맡아한다.

미군과 그 군속은 한달에 일정한 양의 면세물품을 PX에서 살 수 있다. 그 러나 소규모 구매는 월할당 금액에 추가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번 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런 규정을 이용해 1주일에 두세번 부대 안 PX를 돌아다니며 ‘뺑뺑이돌기’를 한다. 택시를 타고 이 매점 저 매점을 돌며 물건을 조금씩 여러 번 사는 것이다. 이 일에는 미군과 계약을 맺고 부대 안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에어리어 콜’(AREA CALL)택시가 이용된 다. 택시기사 가운데는 이 여성들과 조직적으로 연계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대구 에어리어 콜택시는 모두 30대다. 전직 택시기사였던 제보자 박민식(가명)씨는 이 일을 하면서 불법유출 현장을 매일 목격했다. “한 번 트렁크에 실으면 수백만원씩 싣고 나간다카이. 처음에는 뭘라꼬 그렇 게 많이 사는지 몰랐데이.”

이 콜택시는 기본료가 2천원이지만 이런 일을 하게 되면 택시기사들은 적 어도 1만원 안팎의 수고료를 받는다고 한다. 일반 손님들을 태우고 있다 가 미군PX물품을 나르자고 호출이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간다. 기사 들은 이를 “잠수함 탄다”고 표현한다.

박씨에 따르면, 이런 식의 물품유출 결과 대구 중구와 남구 지역의 노래 방이나 술집에서 파는 밀러, 버드와이저 등의 맥주와 양주 대부분은 미군 PX물품이다. 미군PX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일상화·구조화해 있다는 얘기 다.

PX 전국 70여개, 적발된 것만 7억여원

대구에는 미 제19지원사령부인 캠프 헨리, 미군 숙소와 종합위락센터인 캠프 워커, 미군전용 숙소인 캠프 조지, K2공군기지 등 4곳의 미군부대가 있다. 최근 캠프 워커에는 대형매장인 커머세리까지 세워져 미군PX물품의 유출이 더 심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게 이곳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대구지 역의 실태로 미뤄볼 때 전국의 미군부대지역에서는 미군PX물품의 부정유 출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으로 미군부대 안의 PX 는 70여개에 이른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10월 말까지 불법유 출 물품 적발실적은 6억9천9백여만원. 그러나 적발을 피해 유통되는 물품 은 이보다 수백배 더 많을 것이라는 게 당국의 추산이다.

대구=글 김창석 기자 사진 정진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