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부산민심기행/“내 마누라 욕하면 싫지요”

(사진/"아무리 미운 마누라도 내가 욕할 수 있지만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쁘다"는 게 부산지역의 민심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당 탈당을 선언한 바로 다음날 아침. “엄정한 대 선관리”를 다짐하는 김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귓전을 맴도는 11월8일 오전 10시20분. 김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시민들의 발걸음은 유난 히 무거워 보였다.

부산시 최대 번화가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부산진구 부전동 서면로터리 . “누가 지를 키웠는디…. 지가 안 되니까 김영삼 대통령을 쫓가 냅니꺼 . 건방지게.” 문이 막 열린 롯데백화점 안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 낀 김대수(40·상업)씨는 이렇게 내뱉는다. 김 대통령 털어내기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김씨뿐 이 아니다. “마, 이회창씨가 지 손가락으로 지 눈을 쑤서뿌린 기라예. 표떨어지는 줄 모르고….” 백화점 앞 광장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 던 박씨(70)라는 한 노인도 이 총재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는다.

부산시민들의 양면적 정서

유권자 2백70만. 김영삼씨의 당선과 함께 ‘대통령의 도시’로 떠오른 부 산. 그 왕도(王都)의 마음은 요즘 이렇게 불편하다. 지난 92년 대통령 선 거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뒤 고향사람들은 문민대통령을 탄생시켰다는 자긍심으로 살았지만 또한번의 대통령 선거를 40일 앞둔 시 민들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허탈감만 맴돌고 있다.

이회창 총재가 여권의 대표주자로 선출된 뒤부터 이번 선거에서 부산사람 은 ‘들러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택시기사 박태오(46) 씨는 선거를 바라보는 부산 토박이들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부산은 지금 모두 부동층이라예. 우리 지역에서 아무도 안 나왔고 옛날에는 여당 이 조직의 힘으로 부산사람을 묶었는데 지금 부산출신(신한국당)의원들이 서로 갈려 쌈박질이니 누굴 찍을 맘이 들겠심니꺼.” 지역 정서를 대변해 줄 후보도 없고 딱히 누구를 지지하기도 어정쩡한 상황에서 마음을 정하 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출신으로 부산지역의 한 민간방송국에 1년 째 근무하고 있다는 안준호(31)씨는 “사람들 대부분이 선거에 시큰둥한 반응”이라고 전한다. “어차피 영남권 후보가 없는 판이라 그런 것 같다 ”는 설명이다.

그런데 최근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가 충돌하면서 허탈감과 무기력 에 빠져 있던 부산시민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그동안 어쩡정한 태도 에서 벗어나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를 향해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고 나선 것이다. 그 분노의 뿌리는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증오’라는 논 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산시민들만의 이중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다.

파도가 곧 넘칠듯 일렁이는 부둣가를 따라 생겨난 좁은 골목에 빼곡이 늘 어선 좌판대에서 생선 비린내가 질펀하게 배어나는 자갈치시장. 그곳에서 는 현실 정치를 이해하는 부산 민초들의 이런 양면적 정서가 원색적으로 드러난다. “정말 밉지예. 뽑아준 게 우린데 김 대통령이 5년 동안 해준 게 뭐 있심니꺼. 이전맨쿠로 장사도 안 되고 경제도 망치고…. 모든 게 엉망이다 아닙니꺼.” 이곳에서 17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는 김순자(52)씨 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부산시민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김 대통령에 대 한 일종의 배신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푸념이 계속되면서 이내 그의 분노는 방향을 바꾼다.

이인제에 몰표 나올까

“그래도 지를 밀어준 게 김 대통령 아입니꺼. 정치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된 사람이 그렇게 매몰차게 몰아내면 안 되지예. 인간도 아임니더.” 김 대통령의 탈당이 막상 현실로 닥치자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은 또다시 애정으로 바뀌고, 비난의 화살은 이회창 총재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회창 총재에 대한 부산지역 선거운동을 총괄하고 있는 부산시 수영구 남천동 신한국당 부산시지부. 4명의 부장급 당직자와 몇몇 여직원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곳에서 당직자들은 시민의 이런 정서 때문에 골머 리를 앓고 있다. 홍보부장 윤태경씨는 “김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이 깊지 만 다른 사람이 김 대통령을 욕하는 것 또한 참지 못하는 게 부산시민” 이라며 “이 총재의 탈당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 부정적인 감정을 완화하려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7일 경북필승결의대회 식전행 사에서 신한국당 일부 당원들이 김영삼 대통령을 상징하는 ‘03’마스코 트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이벤트를 연출한 사건으로 인한 부담감은 상당했 다. 부산시민들 대다수가 “해도 너무했다” “인간도 아니다”라는 비난 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시지부의 또다른 한 관계자는 “도대체 부산에 서 선거를 하지 말자는 것이냐”며 대구지역 당원들의 경솔한 행동에 분 통을 터뜨렸다. ‘필승 D-40일’ ‘새인물 이회창과 가자. 새정치 새시대 로’라는 커다란 표어가 썰렁한 사무실 분위기와 어울려 더욱 어색하게 다가온다.

이 총재에 대한 부산시민들의 폭발하는 반감은 곧바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진영에 반사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 조짐들은 길거리 여기저기서 쉽게 느껴진다. “주변에서 어른들은 이인제씨를 밀어야 한다 고 말해요. 이회창씨가 해도 너무했다는 거예요.” 부산대 학생이라는 이 재성(24)씨는 “이번에는 영남권 후보도 없고 해서 소신껏 후보를 택하려 했는데…”라며 이렇게 말한다. “김 대통령하고 관계도 안 좋아졌고 다 시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솔직한 심경이다.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연 제구 연산동에서 만난 40대의 한 은행원도 “경제도 망치고 못살어예. 모 두가 썩었다 아닙니꺼. 젊은 사람으로 세대교체를 해 모조리 바꿔야 한다 안캅니꺼”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이인제 후보를 밀자는 이야기다.

실제 여론조사에서도 이인제 후보의 급부상이 감지된다. <한겨레>의 11월 10일 여론조사 결과 부산·경남지역에서 10월25일 35.2%이던 이인제 후보 의 지지율이 40.0%로 올랐다. <한국일보>의 지난 11월7일 여론조사 결과 도 비슷하다. 한달 전인 10월17일 이 지역에서 40.1%이던 것이 52.9%로 급증했다. 이에 견주어 김 대통령에 반기를 든 이회창 총재의 지지율은 4 3.6%에서 무려 20.3%나 급락한 23.3%로 조사됐다.

민주산악회 80%가 신당 합류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민신당 지역조직의 움직임은 자연히 활기를 띠고 있다. 동구 초량2동 부산고등학교 앞 허름한 4층 건물에 자리한 부산지역 민주산악회동부지회. 83년 김 대통령이 단식할 때 부산에서 처음 만들어 진 민주산악회의 산실이라는 이 사무실은 이미 이인제 후보의 부산지역 연락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연락간사를 맡고 있는 지부장 정명덕씨는 “ 부산에서 이미 이인제 바람이 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솔직히 부 산 경제를 망쳤다고 사람들이 YS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면서도 “이회창 총재가 김 대통령과 결별하면서 지지세가 급상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내 마누라 잘못됐다는 것을 잘알고 있고 나는 얼마든지 욕할 수 있지만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쁜 게 인지상정”이라는 말로 부산에서 이 총 재의 하락 이유를 설명한다. 이미 부산지역의 민주산악회 조직의 80%가 이 후보쪽에 합류해 뛰고 있다. 또 쇄도하는 지지와 격려전화를 받기도 벅차다며 기쁜 함성을 지른다. 정 간사는 이 후보의 상승세는 계속될 것 이라고 자신한다. “부산에서 DJ 지지표는 15% 안팎으로 고정돼 있다. 그 런데 나머지는 이대로 가면 DJ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높아지 고 있다. 결국 이 총재마저 김 대통령과 결별한 상황에서 부산시민들은 더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는 거 아이가.” 현실적 대안으로 이 지사에게 또한번 몰표를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직 이 후보의 몰표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20대의 젊은 유권자들 은 아직 이 후보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의 대 한의대 노대섭(30)씨는 “이 지사가 젊고 도전적이라는 것은 매력이다 . 하지만 경선에 불복하고 박정희를 흉내내는 그에게 표를 줘야 할지 아 직 정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지금 같아서는 기권할 것 같다”는 그 는 “가까운 동료들도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초원복국집 사건의 파장 속에서 오히려 지 역감정을 자가발전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몰표를 던진 부산지역 2백70만 유권자들. “김영삼 대통령은 밉다. 하지만 김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은 결코 표를 줄 수 없다”는 이중적인 감정에 묶여 또다시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김 대통령을 본능적(?)으로 미워하는 대구·경북지역 유권자들과 한판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씁쓸한 느낌이 맴돈다.

부산=신승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