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구민심기행/“이회창씨 안아줄라예”

(사진/지난 7월에 열린 신한국당 경선연설회. 그동안 신한국당에 차가웠던 민심이 이회창과 YS의 결별 이후 서서히 온정으로 달궈지고 있다.)

피곤했던가? 11월7일 오후 대구로 내려가는 새마을호 기차 안에서 내내 긴 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선입관을 배제하려 일부러 대구민심에 대한 사전지식을 밀어낸 상태여서인지, 어둑어둑해진 동대구역 대합실에 서 있 자니 왠지 낯설기조차 했다. 지난 8월 각당 후보들이 결정되면서, 대선정 국이 막 뜨기 시작할 무렵 이후 꼭 3개월 만이다.

확 달라진 국민회의 사무실

가장 먼저 약속이 된 국민신당 사무실로 향하는 택시 차창 밖으로 바라본 대구의 좁은 도로 곳곳은 지하철공사 때문에 꽉 막혀 있어 조급증이 일어 나기도 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국민신당 관계자는 8월에는 신한국당 조직 부장이었다. 반월당의 유성환 의원 사무실에 임시본부를 설치한 국민신당 대구사무실에서 그는 이제 이회창 대신 이인제를 ‘이야기’했다. 박정희 신드롬, 경선과정 텔레비전 토론, 비전 제시, 세대교체 열망 등. 청와대 지원설에 대해선 극구 부인했다. 돈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는 많다며 민주산악회 대구회원만 1만명이라고 말한다.

그날밤 대구에서 꽤 규모가 큰 기업을 운영하는 한 기업가를 만났다. 그 는 대구 대선구도 질문에 “기업하는 사람은 100% 여당(신한국당)”이라 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경제계에서 가장 바라는 건 정국안정” 이라며 “DJ가 내각제를 실시하면 정치는 더욱 불안해질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회창의 지지율 3위에 대해선, “그러니까 뒤집어야지”라고까 지 말했다. 한참 동안 부도여파, 자금압박, 은행의 대출경색, 허가문제, 세금가중 등 기업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늘어놓으면서 “김영삼 정부가 경 제를 완전히 망쳐버렸다. 딸린 식구가 많아 이젠 빼도박도 못하지만, 사 업하는 재미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의 토로를 들으며 대구의 밤이 깊어갔다.

다음날 11월8일 토요일 오전 국민회의 대구시지부를 찾았다. 지난 8월 국 민회의 대구시지부를 찾아갈 땐 무척 애를 먹었다. 강변도로 옆 후미진 곳에 위치했던 지부는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고, 근처에 큰 건물도 없었 다. 당시 한참을 헤매다가 지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여직원 한명은 책 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4∼5명의 늙수그레한 지역당원들은 소파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무처장은 “중앙당 지원이 미약해 너무 힘들다” 고 신세타령부터 늘어놓았다. 그런데 11월의 국민회의는 많이 달라져 있 었다. 두달 전 이사했다는 대구시지부 사무실은 과거에 비해 두배는 더 커졌다. 그리고 위치도 동대구역 근처의 대로변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대구는 할 수 있다. 수평적 정권교체” “대선승리 41일전” 플래카드 가 확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고, 여직원 3명은 손님 들에게 차를 내놓느라 앉아있을 틈이 없었다. 서울말씨의 말쑥한 젊은 사 람들이 연신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없었고, 신세타령을 늘어놓던 그 사무처장은 오랫동안 회의를 주재하느라 얼굴보기도 힘들었다. 8월에 는 볼 수 없었던 팽용일 조직부장은 “현 지지율은 13.7∼15% 수준이다. 하지만 대구·경북은 20∼30대 유권자가 57%이므로 상승세가 예상된다. 3 0%가 목표다. DJT연합의 효과가 아직 눈에 띄진 않지만, 서서히 발휘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의욕이 넘쳐나 보였다.

어른들은 이회창, 젊은층은 이인제

이어 들른 신한국당은 8월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사공현철 홍보부장은 최근 이 지역의 이회창 지지 분위기에 고무된 표정이 역력했 다. 그는 “최근 이회창 후보와 김영삼 대통령과의 알력 이후, 격려성 전 화가 많이 걸려온다. 여론조사 믿지 마라,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뛰라 는 주문이 많다. 경선 이후 두달 동안 이인제에게 밀린 게 사실이다. 하 지만 정치개혁 선언과 YS와의 차별화, 청와대의 국민신당 지원설 등으로 인해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다. 또 DJP연합과 내각제 개헌 움직임에 실망 한 반사이익도 보고 있다. 조만간 이 지역 국회의원들의 지각변동도 일어 날 것이다”고 말했다. 나오는 길에 인사치레 겸 “입당자는 많으냐”는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11월 초부터 갑자기 밀어닥쳐 입당원서가 모자라, 입당원서를 새로 프린트했다”고 자랑했다.

3당 시지부를 다 둘러본 뒤, 대구 중심지인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으로 나 갔다. 토요일 낮 데이트 약속을 한 청춘들이 서성대고, 쇼핑객들이 이리 저리 오가는 등 거리는 꽤 붐볐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50대 초반 주인 아 주머니에게 선거 얘기를 꺼냈더니 아주머니는 20대 후반의 아들과 논쟁을 벌였다. “이회창 찍어라, 이회창이 제일 낫더라”고 아들을 닥달한 그 아주머니는 “요즘 나는 택시타면 거스름돈 안 받심니더. 대신 이회창 찍 으라꼬 선전하고 다닙니더. 이인제가 젊고 어쩌고 그카는데 YS와 짝짜쿵 되는 거 보이(보니) 꼴도 보기 싫고예. 내 주변엔 다 이회창 지지라예. 이회창씨 우리 가게 오면 내가 안아줄라 카는데 안 오네예”라고 한다. 이 아주머니의 말은 최소한 대구 중소상인들과 중산층의 주흐름인 듯했다 . 동성로, 중앙공원, 서문시장 등에서 들어본 시민들의 이야기는 이를 확 인해줬다. “DJ는 싫고, 젊은층은 이인제, 어른들은 이회창.”(21·학생) 그는 이인제를 지지했다. “이회창이 최근에 좋아졌심더. 대통령보고 나 가라 카고. 기백이 있다 아잉교. 나는 뭐라 캐도(해도) 경상도 사람이고, 어른들 말씀도 그렇고, 신한국당 찍어야겠심더. 이인제가 박정희 닮았고 어떻고 카더니, 알고 보니 YS꼬봉이었다 아잉교”(28·꽃 노점상) “이회 창이 잘 할 것 같아. 이인제가 되면 국정이 시끄러울 것 같고”(43·가방 가게) “믿을 놈 한놈도 없심더. 이회창이 아들 병역 때문에 고생 마이( 많이) 했는데 이젠 잊혀져 가뿔고. JP, TJ 2년 반씩 나눠먹기 하겠다는데 그러면 나라가 안정이 안 된다카이”(43·안경가게) “YS가 대구 작살냈 는데, YS 찍어줄 수 있나. 이인제가 지가 아무리 YS와 상관없다 캐도 그 걸 누가 믿노. 국민은 뭐 바본줄 아는가베”(56·여·약사) “이인제씨는 인물은 괜찮지만, 대구의 반YS 분위기 때문에 손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당이 둘이라 DJ가 당선될 것 같습니다”(29·컴퓨터 프로그래머) “한 번 바꿔 봐야죠. 이회창씨가 되면 바뀌는 거고, 이인제씨 되면 그대론데. 바꿔서 잘 할지 못할지는 그때 가봐야 아는 거지만”(29·여·주부) “찍 을 데 어딨소. 이회창씨 그만한 흠없는 사람 어딨소. DJ는 은퇴한다 캐쌌 디 다시 나오고. 도대체 믿질 못하겠고, 이인제씨도 남자가 한번 말했으 면 지키야지, 경선 며칠 안 돼서 말 바꾸고 뛰쳐나오고, 그기 뭐요”(83 ·노인) “며칠 전부터 술집에서 대통령 이야기 많이 나오는데 가만히 들 어보면, 이회창씨 지지가 많습니다”(53·슈퍼마켓)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이회창 지지하기로 했심더. 대구에선 여론조사 무시해도 됩니다. 부 동층이 대다순데 뭐. 대구에선 60∼70% 이회창 지지할 낍니더”(35·잠바 가게).

지독한 정치혐오는 씻기는데…

지난 8월 대구는 지독한 정치혐오 탓에 대선에 별 관심이 없었다. 누구를 찍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5분만 이야기하면 지지후보를 밝힌다. 대구는 지금 이회창 후보에게로 큰축이 쏠리는 것 같 다. 그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11월 초였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다른 분위 기인 것이다.

이런 전반적인 이회창 지지 분위기 속에서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구시청의 한 고위 공무원은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대구발전 을 위해 해준 건 아무 것도 없어 신한국당 좋게 안 본다. 그리고 DJ는 어 쨌든 ‘주는 것 없이 싫고’. 그래서 이인제로 간다. 박태준을 개인적으 론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박태준이 DJ한테 간다고 따라갈 사람 별로 없다. 대구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문희갑 시장 정도다. 3당에서 모두 다 문 시장을 찾아와, 회유하고 중앙의 자리를 보장하는 등 삼고초려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문 시장이 대선 전에 어느 한쪽을 밀어준다는 건 불가능하다. 대선 이후 대구발전을 위해 집권당에 갈진 모른다. 문 시장 도 그런 뜻을 은근히 비쳤다”고 말했다. 대구를 떠나기 직전 만난 택시 운전사도 이인제 지지를 강력하게 밝혔다.

표본에 문제는 많겠지만 대구에서 43명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그중 이회 창 지지가 33명, 이인제 지지가 5명이었다. 김대중 지지는 만나지 못했다 . 대구지역 여론조사연구소 ‘온’(ON)의 위현복 소장은 “반YS, 비DJ가 대구의 정서라고 보면 될 것이다. 과거 DJ에 대해선 알려고 노력도 안 했 고, 생각도 안 했다. 그저 거짓말쟁이, 빨갱이 등의 편견에 꽉 사로잡혔 다. DJ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 ‘대통령해도 될 사람이구나’라는 생 각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게 표로 연결되긴 참 어렵다. 대구 에서 DJ는 JP연합과 내각제 선언 이후 지지율이 더 떨어졌다”고 말했다.

하루종일 돌아다녀 몸이 피곤해,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졌다. 대구엔 김영삼 정 부에 대한 피해의식, 지역감정의 편견 등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대구 정서는 대구에서 자생적으로 솟아나는 게 아니다. 대구의 정서를 이 토록 네거티브하게 만든 책임을 대구에만 돌릴 수 있는가? 대구와 대구 사람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대구=권태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