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당당한 청춘, 힘겨운 일상

(사진/시민운동 실무자들은 재정난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기대하기 어렵다. 극빈 수준의 생활에도 주어진 업무에 매달리는 녹색연합의 실무자들.)

녹색연합 김타균(30) 정책부 팀장은 요즘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20평짜리 사무실에서 잠을 깬다. 벌써 사흘째다. 사무실 한구석에 놓인 비좁은 책 상이 침대라면 침대다. 연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 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협의회 이름으로 후보들에게 요구 할 환경부문 공약을 짜야 하고, 토론회 일정도 잡아야 하고, 경남 하동과 남해 주민들 사이에 갈등으로 번져가는 현대제철소 유치 문제도 다뤄야 한다. 몸이 서너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반지하 월세방에 찾아들어야 딱 히 반겨줄 사람도 없어 일이나 한다”며 부스스한 얼굴로 웃음을 짓는다. 일에 빠지다보니 좋은 점도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다보면 몇달 전부터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난다. 그가 일하 고 있는 녹색연합은 여느 시민단체들처럼 요즘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회원들의 회비와 독지가들의 지원으로 버텨온 빠듯한 살림살이마저 휘청거린다. 오랜 불황 탓인지 1만5천명에 이르는 회원들의 회비 납부실 적이 하반기 들어 상반기의 절반 수준인 20∼30%로 떨어졌다. 한달 70만 원 수준의 월급조차 지난 7월 이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40여명의 유 급 간사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다.

밀린 월급에도 보람이 있다면…

지난 94년 12월 공채 4기로 녹색연합에 발을 들인 것은 어쩌면 그의 삶이 떠민 결과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85년 합천댐 건설로 정든 고향땅이 수몰된 뒤 그는 실향민이라는 그늘 밑에서 성장했다. 부모님들은 명절 때 마다 고향을 그리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함께 고향을 등진 마을 어른들 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환경난민”이라 불렀다. 이따 금 환경운동에 발을 들인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자위하곤 한다.

(사진/시민의 힘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실무자들의 일터다. )

환경운동은 그에게는 수몰된 고향을 찾는 길이었다. 첫 월급봉투를 쥐어 들 새도 없이, 출근 1주일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지에서 곧바로 활동 가 연수에 참여할 정도로 그는 거기에 열성을 쏟았다. 철새도래지 을숙도 활용방안 등 각종 환경분쟁에 참여하며 그만의 ‘녹색희망’을 키워왔다. 그 바탕에는 자신의 작은 힘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들의 거친 손길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물론 그가 월급을 바라고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월급은 적으나 많으나 고마울 따름이고, 생활 역시 월급에 맞게 조절하는 데 익숙해졌다 . “소비형태를 변화시키면 생활은 가능하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신조 다. 그는 지금도 “매달 방세 16만원, 교통비 2만원, 식대 5만원 정도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렵지만 조금더 줄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말한 다. 간간이 들어오는 원고료나 친구와 선배들의 도움으로 참고 견딜 만하 다는 것이다.

문제는 재정위기가 개인의 금욕과 빈곤을 강요하는 수준을 넘어 환경운동 의 목표와 전망에 대해 회의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그는 “오랜 연구 와 검토 끝에 꼭 필요한 사업계획을 세웠지만 재정난으로 시도 한번 못해 보고 좌절될 때 착잡한 심정은 허탈감을 넘어선다”고 고백한다. 이런 일 이 반복되다보니 동료나 후배 활동가들도 고민에 빠진다. 시민운동에 과 연 전망이 있는가라는 자문이 술자리를 덮는다. 그러다 끝내 스스로 포기 하고 좌절하며 떠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올들어서만 벌써 두명의 동료 가 녹색연합을 떠났다.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 고 무작정 좋은 날이 있을 테니 더 기다려 보자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정난에 전망 회의… 내핍생활로 유지

외국의 환경단체들과 연대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이태화(28) 간사도 비슷 한 고민을 토로한다. 지난 95년 1월 한국전화번호부주식회사를 퇴직하고 녹색연합 간사로 들어온 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무실에 나오는 일 이 귀찮거나 힘들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편안한 직장을 뛰쳐나올 때 한 심한 놈으로 치부하던 부모의 반대도 그래서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런 그도 재정난 등 최근 우리 시민단체에 닥친 시련에서 자유롭지 않다. 동료들이 경제적 최저선을 견디다 못해 하나둘 뛰쳐나갈 때 그는 큰 고민 에 빠진다. “남아있는 나는 바보인가”라는 자괴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단체의 궁핍이 문제지 결코 간사 개인의 궁핍을 하소연 하자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환경운동을 결심할 때 돈벌이나 윤택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동안 칙칙한 자취방에서 단돈 몇십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면서도 희망을 키워내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은 녹색연합 간사들만의 몫이 아니다. 만성적인 재정난은 모든 시민단체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가장 힘겨운 문제다. 후원의 밤 행사나 물품판매전, 연극공연 등 각종 수익사업을 벌여보지만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몇달의 경상비나, 밀린 임금을 정산하고 나면 또다시 궁핍의 올가미에 걸린다.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 박원석(29) 연대사업부장. 동국대 사회 학과를 졸업한 뒤 94년 10월 참여연대 창립 당시부터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올들어 지난 10월 말에야 8월치 활동비를 받았다. 3년 근속수당에 호봉 본봉을 모두 합쳐야 69만원. 그것도 각계 인사들이 보내준 기증물품전을 통해 마련한 수익금 덕분이다. 참여연대에는 18명의 유급간사들이 있다. 재정사업팀을 따로 꾸려 연극공연 등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여 필요한 재 원을 마련하고 있지만 힘에 부치기는 마찬가지다.

그 또한 다른 시민단체의 간사들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을 내핍으로 견딘다 . 지난 4월 결혼한 아내가 YMCA 시민중계실 간사로 일하면서 보태는 60여 만원의 돈은 그래서 큰 도움이 된다. 박씨 부부의 내핍생활은 거의 바닥 수준이다. 외식이나 공연관람 등은 사치에 가깝다. 일주일을 용돈 4만원 만으로 버틴다. 그래도 “일반 회사원들과 똑같은 것을 기대하고 시민운 동을 하는 게 아니므로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아이라도 생기 면 육아비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솔직히 고민”이라고 털어놓는다.

참여는 않고 요구만 하는 시민들

(사진/시민운동 단체들은 격렬한 살빼기를 통해 지출을 줄여 나가고 있다. 각종 청원운동을 담당하는 경실련 정책실 곽현 간사(사진 오른쪽). )

박씨는 가끔 시민단체 간사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겪는 난처함을 경험한다 . 회사에 다니는 대학 동기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소외와 대화의 장벽을 절감하는 것이다. 술값 계산은 당연히 그들 몫이다. 레저, 재테크 등이 화제로 등장하는 자리에서 그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 정 도는 견딜 수 있다. 오히려 그를 정말 불안하게 하는 것은 시민운동의 현 실에 자리잡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능력을 키워가는 친구들을 볼 때, 갈수록 세분화해가는 시민사회에 맞는 전문능력을 갖춘 운동가가 돼 야 한다는 필요성이 절박하게 다가오지만 현실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정적 취약에서 오는 개인의 경제적 한계는 뒤로 하고라 도, 당장 처리해야 할 실무에 치이는 생활 속에서 전문성을 갖추기란 꿈 같은 일이다. 그는 “아직 젊고 확신도 있으니까 버티는데 앞으로 전문성 을 갖춘 시민단체 활동가로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스럽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경제정의시민실천연합(경실련)은 지난 3월 이른바 ‘김현철 비디오 테이 프 파동’으로 생겨난 조직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단체 최초로 대 대적인 규모축소를 단행했다. 회원이탈과 회비납부 감소, 경기불황에 따 른 기업의 후원금 축소 등 안팎으로 닥친 위기상황에서 기관지 <시민의 신문>을 독립시키는 등 몸집을 줄인 것이다. 지난 5월부터는 상근간사 월 급의 30%를 회비로 반납하는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재정난을 버티지 못해 지난 8, 9월 두달 동안 간사들에게 월급 한푼 주지 못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60여명에 이르던 상근 간사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 나고 이제 절반 수준인 35명만이 남아 있다.

곽현(30) 간사는 이런 위기의 한폭판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군에서 제대해 서울대 동물자원학과 3학년에 복학한 그에게 대학은 예전같지 않 았다. 학생운동의 전망은 불투명하고 민중운동 진영의 주장은 사회의 다 원화된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던 어느날 “시민의 힘에 의한 사회 개혁”을 외치는 경실련의 목소리는 그에게 고민의 출구를 찾 아줬다. 경실련 대학생회에 가입해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지난 해 대학 졸업과 함께 정책실 간사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시민사회 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행정 입법 분야에서의 청원운동이 그의 몫이다.

그는 경실련을 휘몰아친 비디오 파동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 데 하나다. 그만큼 반성을 토대로 시민운동의 개혁을 위한 몸부림도 강하 다. 하지만 그 고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언론과 시민 그리고 활동가들까지 한목소리로 ‘밑바닥 회원에 뿌리박은 시민운동’을 외쳤지만 현실은 아직 멀기만 하다. 곽씨는 “시민들은 우 리를 질타했다. 하지만 참여는 없고 요구는 많다”고 말한다. 몸집을 줄 이고 내실있는 대안제시를 준비하려 하지만, 또다른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사회적 이슈들에 즉각 대응하도록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결국 간사들은 여전히 하루하루 벌어지는 현안들과 폭주하는 실무에 떠밀려 간다.

언제까지 ‘굶주린 지사’를 바랄 건가

“돈과 인력과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시민운동 이 튼실히 뿌리내릴 전망이 있는가”라는 푸념과 좌절감만이 요즘 시민단 체 간사들의 주변을 맴돈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고 대안을 찾아낼 겨를도 없이 관성화된 활동을 반복하기도 벅찬 현실. 한달 몇십만원의 푼돈으로 생계와 활동비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열악한 상황 . 그 속에서 시민사회의 건강함을 유지시켜주는 신선한 소금 역할을 해야 할 활동가들은 하나 둘 시민운동의 현장을 떠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화려하지만 안으로는 현실을 뒤쫓기도 벅찬 환경 속에서 신념 하나로 버 티는 우리더러 굶더라도 지사처럼 살라는 시민들의 질타는 무책임에 가깝 다.” 자신이 시민운동의 주체로 참여하지 않고 회비납부조차 인색한 시 민들을 향해 이들은 이렇게 외치고 싶어한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