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신기루였나, 아시아의 기적은…

(사진/뉴욕증시 폭락을 부른 홍콩 주식시장. 뉴욕증시는 곧 회복세를 보였지만 아시아의 증시는 부침을 거듭했다.)

“아시아의 경제 기적(miracle)은 단지 신기루(mirage)였을까?”

지난 10월 말 아시아 증시 폭락이 전세계 주가 폭락의 도화선이 되면서 ‘아시아 경제 기적’은 끝났는가라는 회의론이 다시 전면적으로 제기되 고 있다. ‘신기루론’은 요컨데 아시아의 이번 주가·환율대란이 아시아 경제 고성장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라는 주장이다. 잘못된 통화정책, 옛 소련식 성장모델, 관료들의 부패 등이 아시아를 ‘몰락의 길’로 이끈 주 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번 주식·외환대란이 일시적 조정기 란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아시아 경제성장의 배경이 됐던 높은 교육열과 저축률 등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를 흔든 '아시아 독감'

지난 7월 초 타이의 바트화 평가절하에서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를 주시 하던 경제전문가들이 아시아 경제 위기를 집중 거론한 것은 10월27일 뉴 욕증시가 사상 최대의 하락세를 보이면서부터다. 뉴욕증시의 폭락을 부른 것이 ‘아시아 증시의 보루’인 홍콩주가의 폭락였기 때문이다. 홍콩증시 는 10월23일과 27일 각각 10.4%, 5.80% 떨어졌다. 이에 뉴욕증시는 10월2 7일 두번이나 자동휴장에 들어가면서 다우존스 공업평균지수가 554.26포 인트나 떨어졌다.

사실 뉴욕증시 폭락이 ‘아시아 독감’ 탓이라는 증거는 뚜렷했다. 주가 폭락이 아시아와 관련이 많은 주식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시아 독 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날 러시아증시도 3시간 동안 거래가 중 단되고 폭락세를 보이는 등 유럽·남미 등 전세계 증시가 동반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것이 10월28일 뉴욕증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세계증시도 되살아 났다. 그러나 아시아증시는 여전히 부침을 거듭했다. 그에 따라 ‘아시아 경제 신기루론’은 그 세를 넓혀왔다.

우선 미국 체이스맨해튼은행의 경제학자 존 립스키는 아시아증시가 미국 달러 기준으로 50% 가량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해 ‘공포감’을 조 성했다. 또 미국의 골드맨삭스투자회사는 말레이시아의 내년도 성장률을 4%로 낮춰잡았고, 타이경제의 성장률이 1.5%로 떨어질 것이란 분석도 제 시됐다.

이들이 이렇게 아시아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증 시폭락은 지금까지 가려져왔던 아시아 경제의 부정적 요소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탓으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번 아시아 증시폭락의 직접 원인으로 부적절한 통화정책을 든다. 홍콩을 비롯해 아시아의 대다수 국 가는 달러화와 자기 통화의 환율을 거의 고정시켜놓고 있다. 이들은 이 조처가 아시아 통화의 고평가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게 됐는데도 적절히 환율을 높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 95년 이후 달러화는 크게 평가절상됐다. 한 예로 달러의 대엔화 환율은 지난 95년 4 월 달러당 79엔선에서 최근에는 1백20엔선으로 오른 상태다. 그런데 여타 아시아 국가는 자국 통화를 거의 달러에 연동시켜 고평가를 피하지 못했 다. 이런 통화의 고평가는 수출부진과 경상수지 악화를 낳아 경제 전체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시아 성장방식, 소련과 유사”

(사진/아시아 금융위기는 바트화 추락에서 시작됐다.
폭락이 계속되던 10월 방콕 외환시장 직원이 바뀐 환율을 적고 있다. )

‘신기루론자’들은 또 아시아 각국이 경제체질 약화에 대응하는 방법도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가령 말레이시아의 모하메드 마하티르 총리는 말레 이시아 링깃화가 폭락하자 조지 소로스 등 미국의 투기성 자본가를 맹비 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외국자본에 대한 이런 비난이 오히려 국내의 외국 자본을 ‘내쫓는 작용’을 해 경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

하지만 이들이 아시아 경제 고성장이 ‘신기루’라고 말하는 데는 좀더 근본적인 요인이 있다. 아시아 경제는 그 성장의 이면에 이미 실패의 씨 앗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 씨앗은 아시아 바로 아시아 경제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했던 ‘권위주의적 정부의 강력한 지도력’이다. 강력한 정부는 강한 추진력을 의미하지만 이는 또 이권·부패와 관련된다. ‘신 기루론자’들은 현재 아시아 경제의 ‘위기’는 이런 부정적 측면이 전면 에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정부주도 정책이 시장기능을 저해해 아시 아 경제의 자원배분의 효율성도 크게 떨어뜨렸다고 판단한다. 또 아시아 의 개발 붐은 자본을 과도한 부동산 투기로 내몰아 자본의 ‘생산성’을 크게 낮췄다고 지적한다.

이런 현상을 학술적으로 정리한 것이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경제학 과 교수인 폴 쿠르그만이다. 그는 이미 지난 94년 아시아 경제가 곧 한계 를 맞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쿠르그만은 아시아의 성장방식이 소련식과 너무나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경제 ‘기적’이 기술혁신 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량투입 증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물량조달이 적어지면 아시아 경제는 바로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 한계는 이미 당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 의장은 10월29일 동남아에서 촉발된 통화 및 증시 위기에도 아시아 경제가 상당기간 “평균 이상의 성장을 계속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 린스펀 의장은 “아시아 경제는 곧 회복세로 돌아서 상당 기간 평균 이상 의 성장을 계속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들이 아시아 경제를 낙관하는 이유는 아시아 경제의 고성장을 유지해온 요소들이 아직 건재하다는데 있다. 이들은 아시아 경제가 여러 한계를 드 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높은 교육열과 저축률, 그리고 광범위한 내수시장 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이론이든 하나의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현상을 낳은 여러 원인들 중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조할 뿐이다. 따 라서 아시아 경제성장이 ‘기적이냐, 신기루냐’라는 논쟁이 우리에게 주 는 의미도 “아시아 경제에 이상징후가 늘어났다”는데 있다. 결국 ‘아 시아 경제 신기루론’은 우리에게 적어도 현재가 우리 경제의 내부를 다 시 한번 점거해볼 시기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는 셈이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