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권리 찾기

약속된 일터에 다른 사람이 근무

(사진/새 백화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꿈이 깨진 박현남양. 미얀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없던 백화점쪽에 섭섭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후사정까지는 설명을 안 해주더라도 최소한 ‘미안하게 됐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더라도 덜 속상했을 거예요.” 박현남(19·대구상서여 자상업고등학교 3학년)양은 대구에 새롭게 들어서는 종합패션백화점 프라 이비트가 부도낸 취업약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사회에 대한 좋지 못한 인 상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상업고등학교에서 3학년2학기는 취업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취업이 결정된 친구들이 빠져나가는 교실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 어수선했 다. 쉬는 시간에 모여 앉아도 화제는 온통 취업이야기뿐이었다. 박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업상담실을 오가는 횟수와 신문의 구인광고란을 예사 롭게 봐 넘길 수 없었다. 이미 두차례나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만족할 만 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한가위 연휴가 끝나면서 마 무리되는 듯했다. 대구의 중심지인 동성로에 새롭게 들어서는 종합패션백 화점 프라이비트에서 판매사원을 모집한다는 취업 추천의뢰서가 학교 게 시판에 내걸린 것이다.

새 건물에서 새로 문을 여는 백화점에서 일을 한다. 백양의 가슴은 콩콩 뛰었다. 정성스럽게 이력서를 작성했다. 처음 겪는 서류심사와 면접에 가 슴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다소 불안했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9월30일부터는 경주에 있는 한화콘도에서 연수도 받았다. 1백40여명의 많 은 사람들이 모였다. 인사는 이렇게 하고, 마케팅이 어떻고…. 심지어는 하루종일 서서 근무하려면 다리 힘을 길러야 한다며 기합처럼 앉았다 일 어났다도 하고 산악훈련도 받았다. 모두가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2박3일 에 걸쳐 실시된 연수는 “나도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는구나”라는 생 각에 힘이 드는지도 몰랐다.

모두가 모인 강당에서 “우리는 한배를 탄 한가족이다. 경력사원들은 새 롭게 일을 시작하는 신입사원들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이 뭉클거리기도 했다.

연수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10월4일 백화점쪽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서 울 본사로 전화를 하라는 거였다. 그러나 토요일인 탓에 담담과장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월요일을 기다려 다시 전화를 했다. 과장은 13일부터 근 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었다. 과장은 다시 자신이 8일 대구 로 내려가니 매장 앞에서 만나자고 시간을 정해주었다. 그러나 약속된 날 약속장소에 과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세차례나 매장을 찾 는 박양에게 점원들은 백화점쪽에서 다시 연락해 줄 거라며 위로해 주었 다. 그러나 출근을 약속한 13일을 하루 앞두고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당장 출근할 때 입을 옷조차도 마땅치 않았다. 12일 오후 박양은 우선 정장을 한벌 구입할 요량으로 동성로로 나섰다.

개점을 며칠 앞둔 프라이비트백화점에서는 함께 연수를 받았던 점원들이 매장을 정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경력사원으로 이번에 함께 입사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도 내일이면 저기서 일을 하고 있겠 지…’라는 생각을 할 즈음에 함께 합격했던 학교 친구들이 보였다. 잠시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난 후 친구들은 벌써 유니폼을 지급받았고 근무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다른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친구는 자기는 13일부터 출근하라 는 연락을 받아 출근준비에 정신이 없다는 거였다. 이상했다. 백화점에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백화점 직원은 박양이 배정받은 ‘비키 ’매장의 총지배인의 호출기 번호를 알려주면서 연락해보라고 했다. 2번 이나 전후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음성메모를 남겼지만 응답이 없었다.

다시 백화점에 연락을 해보았다. 직원은 “비키 매장에서 박양과 연락이 안 돼 다른 사람을 대신 구했다. 백화점은 매장과 직원들을 연결만 시켜 준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답답했다. 처음 연락을 받았던 서울본사의 담담과장에게 다시 연락을 했 다. “박양이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어 매장주가 다른 사람을 구했다” 며 난색을 지었다. 백화점 매장이 직영점이 아니라는 설명이었지만 이해 할 수 없었다.

박양은 분명히 프라이비트백화점 판매사원모집에 응모해 합격했는데…. 아무리 자신이 어리다고 더구나 비키 매장 그 누구도 자신을 면접하지 않 았는데…. 연수조차 받지 않은 다른 사람을 대신 채용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됐느냐고 묻는 박양에게 백화점 직원도, 서울 본사 의 담당과장도 비키 매장도 전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백화점쪽은 사원 을 모집할 때 백화점에 입점하는 각 브랜드 매장에서 임금과 복리후생을 책임지는 파견사원까지 함께 뽑는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껄끄러웠나 보다.

프라이비트백화점뿐만 아니라 유통업계 대부분이 이런 방법으로 직원을 뽑는다. 입점 브랜드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위탁받아 백화점 이름으로 사원을 모집하고 간단한 연수까지 마친 후 입점 브랜드로 보내는 것이다. 이는 브랜드별로 사원을 모집하면 응모자가 적기 때문에 생겨난 편법이다 . 유통업계의 관행처럼 돼버린 편법이 결국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박양에 게 지우기 힘든 멍을 들게 한 셈이었다.

윤승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