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백과사전을 주머니에 담는다

방대한 지식과 상식을 한데 모은 백과사전.

알고자 하는 어떤 정보든지 언제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은 인 류지성사의 결산으로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프랑스의 위니베 르살리스(Universalis)나 영국의 브리태니카 같은 백과사전은 문자 그대 로 지식의 보고다. 바로 이 백과사전이 탄생한 곳이 프랑스다. 오늘날 프 랑스에서 분야별로 각종 백과사전이 발달해 있는 것은 종합이나 집대성을 좋아하는 프랑스의 지적 풍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면면히 이 어오는 디드로와 달랑베르 등 백과전서파의 전통이기도 하다.

백과사전이란 방대한 주제, 다양한 자료를 한데 묶어놓은 것이다. 그러면 거꾸로 이 방대한 자료를 주제별로 분책해 놓으면 어떨까. 그것도 가지고 다니며 지하철에서도 쉽게 꺼내볼 수 있게 주머니판으로 말이다. 이런 발 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프랑스대학출판사(PUF)에서 나온 ‘크 세 줘 ’(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 시리즈다.

스테디셀러로 읽히는 지적 전통의 유산

올해로 벌써 56주년을 맞는 크 세 줘 시리즈는 프랑스 출판사에 길이 빛 나는 기념비적인 시리즈로 평가된다. 이 시리즈는 1백20쪽쯤 되는 얇은 포켓판 대중서 시리즈인데, 백과사전적 내용을 용어나 주제별로 분류해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1941년 폴 앙굴방의 기획안을 바탕으로 주머니 판형으로 출간되기 시작한 크 세 줘 시리즈는 프랑스 서점가의 만년 스테 디셀러로 자리잡았다. 프랑스의 어느 서점을 가도 크 세 줘 시리즈 자리 가 마련돼 있을 정도다. 장 테오도리데스의 생물학의 역사를 첫권으로 지 금까지 나온 책이 통권 3천3백권을 넘었다.

이 방대한 시리즈물에 동원된 각 분야의 전문가만도 3천명에 이른다. 에 이즈면 에이즈, 국제기구면 국제기구, 노동운동이면 노동운동의 내로라 하는 전문가에게 집필을 맡기므로, 크 세 줘 시리즈의 집필자라면 일단 그는 그 분야의 권위자로 꼽힌다. 거꾸로 크 세 줘 시리즈를 집필함으로 써 그 분야의 권위자로 새로이 인정받기도 한다. 알튀세르와 함께 프랑스 최고의 마르크시스트로 평가되는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 교수는 크 세 줘 시리즈 중 마르크시즘(제30권, 1948)을 썼고, 구조주의의 대가 장 피아 제도 이 시리즈 중 구조주의(1311권, 1968)를 집필했다. 두책은 모두 전 문적인 철학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각각 40만부, 20만부나 팔렸다.

크 세 줘 시리즈는 전문서와 대중서의 중간쯤이다. 어떤 분야를 연구하는 고급논문의 참고자료 노릇을 하며, 때로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평범한 독자의 지적호기심을 채워주는 책이 되기도 한다. 대충 몇 가지 제목만 살펴보면 제11권이 암, 70권 X선, 123권 프랑스의 낭만주의, 304권 프랑 스에서 정치적 독트린의 역사, 858권 유럽의회, 1191권 미국에서의 흑인, 1601권 팝음악, 2332권 에이즈(불어로는 SIDA), 2570권 냉전 뒤의 세계, 3073권은 인터넷이다. 제1820권이 라 코레(한국)인 것도 주목할 만한데, 이 책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한국학 교수인 마르크 오랑주와 파리7대학 한국학 교수로 재직했던 이옥 교수 등 4명이 공동으로 썼다. 상식에서 전 문지식, 인문사회과학,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취급되지 않은 주제 가 없을 정도다. 한편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첫권이나 제3300권이나 표지 디자인이 그대로인 것에서도 전통과 연속성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인의 정 신을 엿볼 수 있다. 또 옛날에 나온 책일 경우 내용적으론 개정판이지만 투박한 옛 활자의 동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점도 돋보인다.

해마다 1백80종 펴내… 40개국서 번역

최근에는 이 책의 순서별, 주제별 색인을 모아 1백60쪽짜리 단행본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단행본 목록은 대량으로 찍어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해마다 크 세 줘 시리즈는 1백80종씩의 신간을 내고 있고, 3백종의 재판 을 찍는다. 지금까지 총 1억6천만권 이상이 팔렸으며 전세계 40개국어로 번역됐다. 물론 크 세 줘 시리즈와 유사한 주머니판 백과사전은 몇종이 더 있다. 성공적 모방이라 할 수 있는 명문 에코노미카 출판사의 분야별 포쉬(주머니) 시리즈나 라 데쿠베르트의 문고판 등도 내용이나 체계면에 서는 크 세 줘와 견줄 만하지만 그래도 3천권이 넘는 크 세 줘의 방대함 과 권위에는 역시 비할 바가 못된다.

지식은 꾸준히 늘려만 갈 것이 아니라 때로는 종합하고 집대성하는 지혜 가 필요하다. 또 집대성된 지식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건 더 중요한 과 제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크 세 줘 시리즈를 관통하고 있는 정신이다. 당장 주머니판 백과사전의 독자적인 한국판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파리=최연구 통신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