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루서블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50년대 말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기에 몰려 증언대에 서면서, 아서 밀러는 <크루서블> 원작을 떠올렸을 것이다. 명백 히 <크루서블>은 당시 매카시 사냥에 대한 아서 밀러의 정치적 알레고리 다. 현대에서 중세로 넘어가고, 미국 정치사회에서 조그만 마을로 무대는 바뀌지만, 광기어린 담론이라는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 <크루서블>에서 매카시는 시종일관 거짓담론을 만들어가는 에비 게 일(위노나 라이더)로 형상화되고, 매카시즘에 동조했던 정치인들은 10대 소녀들로 바뀐다. 니콜라스 하이트너 감독은 매카시즘 당시 미국을 중세 마을로 축소시켜 두 평행선을 설정해 놓았다. 첫번째 축엔 재산가이면서 탐욕스런 푸트냄과 종교적 권위로 가득 찬 패리스, 다른 한편엔 이들의 위선을 거부하는 프록터(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있다.

영화 <크루서블>은 아서 밀러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하이트너 감독도 이 점을 잊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공간은 연 극적이고, 배우들의 연기 또한 연극적 동작선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영 국 연극 <조지왕의 광기>를 영화화했던 하이트너 감독은 토니상을 비롯한 연극상을 5차례나 수상했던 연극 연출가 출신이다.

<크루서블>은 청교도적 교리와 법이 교착점을 이루고, 말도 안 되는 담론 들이 형성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데, 더 큰 문제는 생존과 안위이다. 이것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이게 되고, 억압된 담론은 꼬리에 꼬 리를 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안위는 공격성을 띠게 되고, 그래서 끊임없이 파괴공작을 수행한다. 원작자 아서 밀러의 고민과 저항은 여기 에서 시작된다. 아서 밀러는 자아의 분신인 프록터란 인물을 설정해 저항 의식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비록 이분법적 한계로 치닫고 있기는 하지만 프록터의 죽음은 아서 밀러의 매카시즘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드 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디선가 또다른 광기가 휘몰아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아서 밀러에게 인류의 광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 이었다.

신문을 펴고 뉴스를 보라! 혹시 이런 광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만일 그렇 다면 중세 유럽의 억압성이 변형된 모습으로 지금 어디선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의수/ 영화평론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