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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중국의 시각과 서구의 시각이 충돌하는 두편의 영화에는 변화로 인한 두려움이 바탕색을 이룬다. <차이니스 박스>의 한 장면.)
“1997.7.1 홍콩반환-. 그러나 내 사랑만은 반환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그대 또한 아직 젊은데…” “1997년 7월1일, 홍콩에 바치는 중국 대륙의 헌사!”
10월25일과 10월18일 1주일 간격으로 각각 개봉하는 <차이니즈 박스>와 < 아편전쟁>의 포스터 문구다. 홍콩의 마지막과 시작(?)이라는 전혀 다른 역사의 지점에서 홍콩반환을 바라보는 두 편의 영화. 10월17일 오후 7시 연세대 대강당은 1천명이 족히 넘음직한 학생들로 꽉 찼다. 불이 꺼지면 서 피리소리인 듯도 하고, 아쟁소리 같기도 한 신비스런 동양음악을 깔리 고, 컴퓨터그래픽으로 육각형의 ‘차이니즈 박스’가 닫혀지는 장면으로 영화 <차이니즈 박스>는 시작된다. 반환=닫는다?
비극적 영상, 무얼 허탈해 하는가
복잡한 홍콩의 시장, 중국인 노파의 옆으로 찢어진 눈매가 클로즈업되고, 홍콩거리와 홍콩인들을 뒷배경으로 선글라스를 낀 영국인 특파원 존(제레 미 아이언스)이 등장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이 존의 각막 바깥 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첫머리에 존은 “15년간 홍콩에 살았지만 난 홍콩을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영화는 존의 ‘홍콩알기’인 것 같다.
96년 12월31일 송년 선상파티에서 홍콩인과 영국인들은 “우리가 생각하 는 홍콩이 내년에도 그대로이기를 원하며” 건배한다. 그런데 갑자기 총 을 들고 튀어나온 한 청년이 “개인적, 문화적 자유상실에 대한 항거”라 며 그 자리에서 자살한다. 청년의 자살, 존의 시한부 인생, 그리고 마지 막 홍콩을 담는 존의 흔들리는 캠코드. 영화는 처음부터 색깔을 분명히 했다. 등장인물의 대사는 이를 더욱 강화시킨다. “홍콩은 절망의 도시로 변했다” “홍콩은 화산폭발 전의 폼페이” “깨진 약속의 땅” “마지막 홍콩” 등등.
96년 12월31일부터 97년 7월1일 홍콩반환까지 마지막(?) 홍콩 6개월을 담 은 영화 줄거리는 간단하다. 불치병에 걸린 영국인 기자 존은 홍콩여인 비비안(공리)을 사랑한다. 비비안은 중국본토 출신으로 창녀생활을 했던 과거 때문에 그를 떠나고 마는 본토출신 부호 창과 존 사이에서 갈등하다 , 존에게로 간다. 그리고 존은 비비안과 홍콩에서 마지막 삶과 사랑을 불 태우다, 7월1일 영국기 유니언 잭이 내려지는 순간 홍콩바다 위에서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찍으며 숨을 거둔다. 존에게 홍콩은 바로 비비안이었 다. 동양적 신비로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인. 끼워맞추기식 영화보기일 진 모르지만, 존과 비비안의 애정사(愛情史)마저도 영국과 홍콩의 역사 축소판 같다. 처음 냉정한 비비안에 대한 존의 구애는 애처로울 정도였고 , 결국 창으로부터 버림받은 비비안과 존이 며칠 동안 밀애를 나누다, 이 제 존은 죽고, 비비안은 혼자 자신의 길을 간다. 존의 마지막 독백은 ‘ 동양의 진주’ 홍콩에 보내는 서구인의 마지막 애사(哀詞)다. “당신은 내게 진정한 삶을 줬소,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오, 우린 영원히 사랑했소.”
영화가 끝난 뒤의 웅성거림 속에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툭 툭 불거지긴 했으나, 그 목소리에 불만은 별반 섞여있지 않은 듯했다. 어 쨌든 영화는 아름다웠으니까. 영상이나 구도가 잘 짜여진 한편의 완제품 을 보는 듯했고, 어설픈 비약도, 군더더기도 없이 적재적소에 인물과 사 물을 배치한 감독의 테크닉이 돋보였다.
시사회장에서 송윤진(20·여·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 공학부)씨는 “스크 린이 존을 통해 한번 걸러진데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표현하려다 보 니,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아비정전>에서 본 홍콩 이미지는 축축하 고 어둡긴 하지만 비관적이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간다는 느낌이었는데” 라고 말했다. 함께 영화를 본 이지선(21·여·연세대 행정2)씨도 “손님 의 시각으로 홍콩을 돌아다본 것 아니냐? 그 땅에서 끝까지 살아가야 될 사람들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본 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러브스토 리는 괜찮았다”고 토를 달았다.
화면엔 영국인의 시선이 숨어 있었다
홍콩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귀화 미국인 웨인 왕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정치나 홍콩반환의 특수성에 영화의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단지 홍콩반환을 하나의 그림으로 사용하길 원했다”고 말 했으나,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내가 식민지 국민으로 길러졌고, 나의 영국인 기질이 나의 중국인 기질만큼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차이니즈 박스>에는 존과 비비안 외에 또 한명이 있다. 10대 때 영국인 애인과 사귀다 실연당하고, 자살을 기도하다 얼굴에 흉칙한 상처 를 입은 진(장만옥)이다. 길거리에서 진을 만난 존은 그를 홍콩의 일상을 담은 비디오물 소재로 삼는다. 진은 홍콩일상의 한 단면이기도 한 밀매와 범죄의 어두운 공간 속에서 행동하는 거리의 여인이다. 순간적이며, 저돌 적이고, 즉흥적인 그녀의 행동은 빠른 속도로 적응하는 도시, 홍콩의 특 징이다. 그녀의 얼굴은 정교하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끔찍하게 무섭다. 오리엔탈리즘과 황화론(黃禍論)이 혼합된 서구인의 의식 속에서 진은 비 비안보다 더 홍콩적일 것이다. 영국과의 헤어짐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으 나, 홍콩에서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반쪽 미인 진이 온전한 미인이 될 지, 완전한 흉물이 될지 알기란 쉽지 않다.
다음날 대한극장에선 중국영화 <아편전쟁>이 개봉됐다. 극장 안은 예상대 로(?) 썰렁했다. 토요일 낮, 개봉 첫날이었음에도 1층이 채 반도 차지 않 았다. 쿵쾅거리는 북소리와 함께 영화는 시작했다. <차이니스 박스>의 여 성적인 첫 음악과는 달리. 마치 ‘중국의 소리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외 치는 양. 그리고 “민족의 역사가 되살아날 때 굴욕의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다”라는 문구가 화면 가득이 채워치며 그 역사를 시작한다. 역사( 歷史)를 그대로 재현한 영화는 마치 거대한 건축 역사(役事)를 연상시킨 다. 아편 판매상의 교수형, 대규모 아편소각, 그리고 전쟁 등 역사영화가 으레 그러하듯 영화는 ‘대형’이다. 매 장면 2천여명의 엑스트라, 중국 영화사상 최고라는 1백50억원의 제작비가 진가를 발휘한다. 영화 곳곳엔 중국인 특유의 자존심이 상당하다. 영화 속에서 중국인들과 영국인들은 서로를 “야만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작은 섬 영국이, 중국의 속국도 안 되는 곳이”라는 황제 도광제의 말에는 중국인 특유의 오만함마저 드 러낸다. 영화 속에서 중국은 비록 근대무기를 장착한 영국해군의 엄청난 파괴력 앞에 철저하게 패배하지만, 땅위의 육박전에서 중국인이 영국인의 창칼에 무릎을 꿇는 장면은 화면에선 거의 볼 수 없다. 오히려 나약하게 생긴 영국인들이 거꾸러지고 엎어지고, 칼에 찔리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절대 땅을 내줄 순 없다는 중국의 애원에도 결국 홍콩섬엔 ‘Hong Kong British Teritority’라는 나무팻말이 박힌다. 그리고 1백50년 뒤 < 차이니즈 박스>에서 내려질 그 유니언 잭이 영국국가와 함께 올라간다. 영화의 마지막은 비오는 자금성에서 조상들 앞에서 속죄의 절을 하는 황 제의 그치지 않는 울음이다. 태화전 밖 거대한 석사자의 눈에선 붉은 빛 이 발하고. 끝이다. 혼자 영화를 보러온 김명진(59·의사)씨는 “동양인 으로서 서양에 눌리기 시작한 장면을 돌아보니 참담했다. 역사의 와중에 서 한때 밀렸다가 다시 회복하는 데 대해 착잡한 감정이다”라고 말했다.
빼앗긴 역사의 복원, 변화는 두렵다
얼마전 방한한 <아편전쟁>의 시에진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를 통해 “홍콩인들에게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를 알리기 위해 <아편전쟁>을 만들 었다”며 “영국이 강제로 홍콩을 빼앗았는데, 서구인들이 상실감을 느낀 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실에선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듯한 혼돈이 여전히 존재한다.
영화 <아편전쟁>에서 한 중국장군은 홍콩이 영국으로 넘겨지기 직전, 오 래된 도자기를 깨뜨리며 “이게 중국의 미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암담했던 홍콩이 다시 중국이 되면서 그 장군의 불안함이 또한번 홍콩 을 겉돈다. 코스모폴리탄 웨인 왕과 민족주의 감독 시에진은 전혀 다른 홍콩을 이야기하지만, 1백5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조상과 후손들의 의식 을 함께 지배한 것은 똑같이 ‘변화’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 아닌 가?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30일 제 18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