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하지 말라”고만 할 것인가

(사진/청소년보호위원회는 내년 초부터 유흥업소들이 몰려있는 곳을 통금구역으로 지정해 18세 미만 청소년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돈암동의 밤 풍경.)

두달간의 계도기간을 거쳐 지난 9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 청소년보호 법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청소년보호법은 각종 음란·폭력성의 각종 유해 매체물 및 약물의 유통규 제와 청소년 유해업소 출입 및 고용제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 이 법에 따라 설치된 청소년보호위원회(위원장 강지원)는 술·담배· 본드는 물론 청소년에 유해한 만화 비디오 등 각종 미디어 등의 유통금지 와 각종 유해업소의 청소년 출입제한 등 강력한 조치를 잇따라 취하고 있 다. 이에 따라 주변의 많은 환경들이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다.

신분증 확인해야 쇠고랑 안 찬다?

미성년자를 고용한 단란주점 주인이 청소년보호법 위반 혐의로 첫 실형이 선고됐으며, 청소년에게 술을 판 구멍가게 주인이나 음란만화를 대여한 도서대여점 주인 등이 줄줄이 입건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업소에서는 젊은 손님의 나이를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풍경도 어렵 지 않게 볼 수 있다. 성인만화, 음란 주간지 등에는 ‘청소년은 볼 수 없 다’는 딱지가 붙었으며, 청소년에 유해한 방송 프로그램에도 ‘18세 미 만 시청불가’라는 뜻의 18을 새긴 원 표시가 화면에 뜨고 있다. 단란주 점 비디오방 전화방 무도장 섹스숍 등에는 18세 미만 출입금지라는 팻말 이 나붙었다.

검찰도 학교폭력 추방을 위주로 시작했던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 동’을 청소년 유해업소에 대한 대대적 단속으로 확대하고 있다. 검찰이 그동안 사실상 묵인돼왔던 사창가에 대한 단속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 서다. 검찰은 지난 9월30일 영등포구 신길동 우신극장 뒤편 윤락업소에 대한 단속을 벌여 47곳을 폐쇄했으며 이후 지속적인 단속방침을 밝히고 있다. 경찰도 지난 10월15일 서울의 대표적 사창가인 동대문구 전농동 속 칭 ‘청량리 588’과 성북동 하월곡동의 ‘미아리 텍사스’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여 포주와 윤락녀 등을 무더기로 연행했다. 경찰청은 청소년보 호법이 본격 시행된 지난 9월 한달 동안 위반사범에 대한 집중단속을 벌 여 2천41명을 적발해 이중 미성년자를 유흥주점에 고용한 장미경씨(30· 여·충북 청원군 강의면) 등 43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천9백85명은 불구 속, 13명은 즉심처리했다고 1일 밝혔다.

이처럼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된 이후 당국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법집행 에 나서면서 청소년에 대한 술·담배 등 판매 금지조처와 유해업소 단속 등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 언론과 국민들도 청소년보호라는 대 의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국가적인 캠페인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이법이 청소년보호의 든든 한 울타리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곳곳에 널려있음 을 보여주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우선 법망을 피해 청소년들에게 술·담배를 파는 업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경찰이 지난 9월 한달 동안 실시한 단속 현황을 유형별로 보면 술 ·담배와 접착제 등의 유해약물을 청소년들에게 판매하다 적발된 경우가 9백99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유흥주점이나 노래연습장 등의 청소년 유 해업소에서 청소년을 고용하거나 출입시킨 경우 7백94건, 음란 비디오테 이프와 도서잡지를 대여하거나 판매한 경우 2백48건 등 순이었다. 두달 동안의 계도기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을 상대로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 이 아직도 적지 않으며 이런 유통구조를 뿌리뽑기에는 그만큼 많은 시간 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아줌마 삐끼’ 많아졌지만…

(사진/화영리·돈암동 등엔 아직도 10대 삐끼들이 적지 않다. )

실제로 아직도 길거리에는 10대 청소년들이 버젓이 담배를 피우거나 대학 로 등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노원역과 돈암동 가 리봉동 등 10대들이 많이 몰리는 곳도 미성년자들은 손님으로 혹은 종업 원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드나들고 있다. 노래방과 비디오방 소주방 등 유흥업소와 각종 음식점이 몰려있는 신촌의 그레이스백화점 뒤편이나 화 양리 돈암동 등지에는 호객꾼들 가운데도 10대들이 적지 않다.

신촌 유흥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전단을 돌리던 앳된 얼굴의 소녀는 “ 요즘은 청소년보호법인가 뭔가 때문인지 삐끼들 가운데 아줌마들이 많아 진 것 같지만 삐끼로 일하는 데는 아직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한 고교생은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된 뒤부터 언론 등에서 하도 떠드는 바람에 편의점이나 동네 가게 같은 데서는 담배를 사기가 조금 껄끄럽게 느껴진다”며 “그러나 손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가판대나 카페같은 데서는 비교적 손쉽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또 “편의점에 갔더니 주인아저씨가 청소년들에게는 담배를 팔지 않는다고 해 그냥 돌아 섰다. 그런데 가게 앞에는 나보다 어리게 보이는 청소년이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른들은 우리 가게에서 담배를 안 팔아 적발되지 않으면 그만일 뿐 가게 밖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나몰라라 하는 것이 사실”이라 고 꼬집었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내년 초부터 서울 신촌, 부산 온천동, 광주 황금동 등 청소년이 많이 모이는 곳을 청소년 야간 통행금지구역으로 정해 매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통금을 실시하기로 하고 전국 시도에 이런 방침을 시달한 바 있다. 시·군·구 등 기초자치단체들은 이 준칙에 맞춰 청소년보호조례를 제정해 유흥업소들이 몰려있는 곳을 통금구역으로 지정해 18세 미만 청소년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게 된다.

학교 주변 유해업소도 중점적인 단속대상이 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들 업소가 버젓이 성업중인 것도 문제다. 최근 서울시교육청 국정감사 자료 에 따르면 지난 90년 학교보건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난 95년 말까지 이전 폐쇄하도록 한 시내 학교주변 유해업소 7천6백여곳 가운데 아직 1천 여곳이 계속 영업중인 것으로 드러났다.이 가운데는 컴퓨터 오락실, 만화 가게, 여관 등 숙박업소, 유흥주점 등이 많았다.

‘사전심의 부활’ 논란

또 청소년보호법이 사실상 사전 심의를 부활시키는 것이라는 논란도 끊이 지 않고 있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다른 법령의 규정에 의한 심의기관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음반과 비디오물, 전자유지기구기판, 공연물, 방 송프로그램 간행물, 광고선전물 등의 청소년에 대한 유해여부를 심의 결 정할 수 있다. 또 다른 법령에 의한 심의기관의 요청이 있는 매체물이나 청소년 유해여부 심의를 받지 않고 유통되는 매체물은 청소년보호위원회 가 직접 심의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청소년 유해매체물에 대한 유해여부 심의를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져 있다.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작성해 배포한 ‘청소년 유해매체 목록표’는 1천7백 종, 5백10만권의 만화를 유해매체로 규정해 만화계와 청소년들이 강력히 반발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진보적 주장을 담은 재야단체의 회원지에 대해 청소년보호법을 적용해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고시해 배포를 제 한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또 당국이 청소년보호법 위반사범을 단속하면 유흥업소 근처뿐만 아니라 학교 주변에서도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마구잡이 불심검문을 벌여 비 난여론을 자초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에는 법망을 피해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신종업소 등도 나타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자주 찾는 일부 디스코텍의 경우 이른바 ‘서비스맨’ 을 통해 미성년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서비스맨들은 중고교 졸업앨 범 등에서 인적사항을 확보해 전화로 연락하거나 광고우편물을 보내 청소 년들을 유혹한다. 특히 ‘새벽 7시까지 놀 수 있는 곳’ ‘부킹을 책임진 다’ 등의 문구로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있다. 일부 업소들이 청소년들에 게 업소를 임대해 줘 아예 출입구를 닫아 걸고 단속을 피하기도 한다. 청 소년들은 카페나 클럽을 3시간에 20만∼30만원에 임대해 친구들에게 일일 주점 형식의 티켓을 팔고 찾아오는 청소년들에게 술과 담배를 팔기도 한 다.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 편의점이나 편의방 그리고 동네의 영세한 슈 퍼마켓에서는 단속이 두려워 청소년들에게 술담배 판매를 하지 않고 있지 만 밤 늦은 시각에 술에 취한 채 술담배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에게 판매를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촌의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 이트로 일하는 김아무개씨(22)는 10대 남자들에게 술과 담배 판매를 거절 했다가 이들로부터 심한 욕설을 듣는 등 판매거절이 힘들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지난 10월1일에는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윤아무개씨가 술에 취한 1 0대들에게 담배 판매를 거절했다가 이들로부터 행패를 당하자 뺨을 때렸 다가 폭력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술·담배 판매 거절하다 봉변도

(사진/미성년에 대한 술·담배 판매금지가 국가적 캠페인으로 확대되는 야상이다. 10월17일 서울 삼선교에서 열린 유흥업소 주민들의 청소년보호 자율정화실천 캠페인. )

법에 따라 술 담배를 팔지 않을 때 거칠게 항의하거나 윽박지르는 청소년 들을 대처할 능력이 소매상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업주들은 “청소년보호에는 동감하자만 생존권이 걸려있는 영업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볼멘 소리도 나오고 있다. 술 담배 음란물 등 유통에 관한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이런 것들을 팔면 엄히 다스리겠다는 처벌만능주의로는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는 얘기 다.

전문가들은 “구멍가게나 책대여점, 비디오방 주인 같은 영세상인만을 먼 저 규제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청소년에게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 사하는 해적판 만화제작자나 음란비디오물 수입업자를 먼저 규제하고 점 차 중간유통업자를 통제하면 자동적으로 소매사업자는 규제될 수 있다” 고 지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소년보호법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청소년 들이 쉴 만한 공간 등 대안은 별로 없는데 단속과 금지 위주로 이뤄져 있 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청소년들이 갈 곳은 마련해 주지 않은 채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출입을 제한하는 데 큰 반감을 갖고 있다. 청소년 들이 많이 이용하는 컴퓨터 통신 토론방 등에서는 “오락실 가지 마라, 만화 보지 마라, 노래방 가지 마라, 그럼 우리는 죽도록 공부만 해야 하 나” “일요일날 친구들이랑 놀러나가면 갈 곳이 없다. 청소년이 갈 곳이 나 마련해 두고 가지 말라 해야지” 등의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려면 이런 환경에 대한 규제와 격리와 함께 청소년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독서실이나 공부방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청소년 문 화공간이 없는 상태에서는 청소년들의 활발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용교 광주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우리 청소년은 세계 어느 나라 아이 들보다도 많은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만 방송을 읽고 쓰고 만드는 방 법을 잘 모른다. 교육과정에 미술시간은 있지만 만화그리기, 비디오찍기 를 가르치는 학교는 거의 없다”고 지적하고 “유해한 매체를 규제하고 추방하자는 소극적인 목표에서 벗어나 유익한 매체를 선별하고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활동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를 위해 전문가단체들이 만화학교, 비디오제작학교,탤런트 학교, 미디어 교실 등을 주관해 청소년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유 익한 매체를 선별하고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한편 청소년수련 원이나 청소년회관을 종합문화공간으로 개방해 청소년들이 다양한 문화활 동을 배우고 또래들을 사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