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한국경제 못 믿겠다”

(사진/썰렁한 증권사 객장. 증시를 살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한 불확실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주식시장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주가하락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던 종합지수 600이 붕괴되자 투자자들은 놀 라움보다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투의 허탈감을 나타내고 있다.

변화된 대출패턴

600선은 지난 1월 노동법 개정 관련 노동계 총파업과 한보 부도가 이어지 며 주식시장이 흔들릴 때도 무너지지 않은 저항선이었다. 이런 600선이 쉽게 붕괴됐다. 더구나 정부가 주식 액면분할 허용 등 증시부양책을 내놓 은 지 사흘 만에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거침없는 급락세를 보이며 무너졌 다. 사실 주식시장 안팎의 여건을 살펴보면 600선 붕괴는 오히려 필연이 라고 볼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는 그동안 주식시장 내 자금 수급불안이 가중돼 왔다. 수요에 해당하는 고객예탁금과 공급에 해당하는 신용융자잔고 간의 차액은 지난 6월 +3천5백여억원대에서 최근에는 -8천억원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급변했 다. 투자심리 위축으로 고객예탁금이 급감하는 반면 신용(외상)으로 산 주식들은 주가폭락 속에 악성 급매물로 바뀌어 주식시장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식시장 침체의 좀더 근본적인 원인은 주식시장 자체에서보다도 우리나라 전체상황에서 찾아진다. 경제가 침체국면에서 좀처럼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기아사태 장기화에 따른 금융시장 불안과 기업 연쇄부 도 공포, 이로 인해 외국인투자가들이 한국경제의 미래를 믿지 못하고 주 식 팔아치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 주가하락의 주범인 것이다. 여 기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터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공방이란 정치권의 불안 요소는 그로기 상태의 주식시장에 마지막 결정타를 가했다 .

기아그룹 회장단과 정부가 힘겨루기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가 어 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금융시장을 짓누르고 있다. 은행들은 종 합금융사에 대해 이면보증된 기업어음(CP)의 대지급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일부 일반 예금자들도 종금사의 신용상태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돈을 빼내가고 있다. 똥줄이 탄 종금사들은 기업과 파이낸스사 등에 빌려준 여 신 회수에 나서고 있다. 금융기관의 보수적인 자금운용은 대출창구 경색 으로 귀결된다.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종전엔 자금이 급한 기업이 있으 면 우선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내부 자금운용을 조정했지만 요즈음엔 조 정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자금을 푼다”고 기업 연쇄부도 이후 변화된 대 출패턴을 설명했다.

부채가 많은 대기업들은 물론 비교적 건실하다는 중견·중소기업들도 잇 따라 자금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미 올해 들어 한보 우성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태일정밀 바로크가구가 부도 또는 부도 위기를 맞았다. 지금도 10대그룹을 포함한 여러 우량대기업들이 부도리스 트에 오르고 심지어 “삼성, 현대도 돈이 달린다더라”는 설까지 공공연 히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금융기관들의 자금회수로 흑자도산한 바 로크가구 사태는 투자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증권협회의 한 임 원은 “자금시장 왜곡으로 인해 멀쩡한 기업도 하루아침에 부도가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한탄했다.

증시 붕괴에 따른 직접금융시장의 경색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기업들의 자금난 악화→기업부도 증가→증시불안 가중 및 주가폭락이라는 악순환으 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미 5대 그룹을 제외하고는 회사채를 발행하기 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들의 연쇄도산으로 엄청나게 많은 부실채 권을 짊어지고 있는 은행 등 금융기관들도 주가하락에 따른 손실로 적자 가 늘어나는 이중고에 신음하고 있다.

영국·홍콩계 자본 본격 철수 움직임

부도위기 기업들이 화의나 부도유예협약 적용으로 부도를 면했다고 하지 만 외국인들은 이를 부도를 낸 것과 다름없다고 보고 있다. 주거래은행 등 관련 금융기관들이 수십조원의 부실채권을 떠안게 돼 금융기관들의 대 외신용도가 추락하게 된 것도 물론이다. 이에 따라 외국인들은 한국경제 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고 국내 주식투자자금을 급격히 철수시키는 양상 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 기아사태 발생 이후 8월부터 시작된 외국인 주식 매도세는 애초 엔 달러대비 원화환율의 급등에 따른 환차손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 반응 의 성격이 짙었다. 단기간에 고수익을 추구하는 헤지펀드들이 주로 국내 주식시장에서 돈을 빼나갔고 말레이시아 등에 설정돼 있는 국내 증권사 역외펀드들이 해외투자 비중을 늘리기 위해 국내주식을 많이 판 것이 당 시 외국인 매도세의 실상이었다. 일부에서는 외국인 투자한도 추가 확대 를 앞두고 외국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주식을 내다팔아 한도확대 뒤 원 하는 우량주를 사들이기 위한 교체매매를 하고 있는 것이란 낙관적인 해 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 연쇄부도가 현실화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한국 주식시장의 오랜 고객인 영국·홍콩계 자금이 본격적인 철수 움직임 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들은 “이들 자금이 한국경 제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한국시장에 대한 투자비중을 줄이 는 전략적 철수에 돌입했다”고 전했다. 투자한도가 확대돼도 이들 자금 은 오히려 유입되기보다 유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다만 그동안 국내시장 투자비중이 적었던 장기투자 위주의 미국계 연기금 자금이 아직까지 한국경제의 성장성을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한도확대 뒤 국내주식 매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는 게 현 시점에서의 거 의 유일한 희망이다.

비자금 공방은 그렇지 않아도 꽉 막혔던 주식시장 안팎의 돈 흐름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검찰의 비자금 수사가 본격화하면 주식계좌에 대한 추적 도 불보듯 뻔하다. 주식시장과 지하경제를 오가며 돈을 주물럭거리는 큰 손들이 몸을 움츠리면서 투자심리는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주식시 장 안팎의 전반적인 악조건 아래 그래도 무너지지 않을듯 했던 600선이 붕괴한 데는 결국 비자금 공방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450선 붕괴도 멀잖다

600이 무너진 이제 주식시장은 어디로 갈 것인가?

비관론을 펼치는 이들은 마지노선이던 600이 무너진 이상 550은 물론 500 , 나아가 450선도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장담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 들은 주가가 외국인 한도확대 효과와 정부 부양책 등으로 대선 전후 한두 차례 600선 이상으로 반등할 것이나 경제 전반의 불안이 가중되면서 내년 1·4분기나 2·4분기 때까지 500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증시부양책 바로뒤 600이 무너지면서 정부가 근로자 주식저축 한도 확대 등 추가 부양책을 내놓았는데도 역시 약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는 상 황은 비관적 전망에 무게를 더해준다. 증권업계는 자금의 출처를 묻지 않 는 무기명장기채권을 발행해 기업자금난을 완화시키는 등의 추가대책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한 불확실성을 근본적 으로 제거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경우 한국경제가 금융불안 및 기업 연쇄 부도와 폭락장세가 구조화되는 일본형 복합불황에 진입할 것이라는 최악 의 시나리오까지 내놓고 있다. 일본경제는 지난 91년 이후 거품이 꺼지면 서 1차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그 여파로 금융위기가 조성되면서 기업 들이 흑자도산하고 주가가 떨어지는 장기 불황이 이어졌다. 최근 한국경 제도 주가가 80년대 후반 수준으로 뒷걸음질하고 부동산 지가지수가 지난 92년 110포인트까지 올랐다가 100선으로 주저앉았다. 여기에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 시중자금이 충분한 데도 특융까지 받은 종금사들이 보유 어음 을 마구 돌려 일부 기업의 흑자도산을 불러오는 등 일본과 비슷한 움직임 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증권전문가들은 기아사태 해결을 고리로 해서 금융시 장 불안만 해소된다면 주식시장이 최악의 침체국면을 벗어날 수 있을 것 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주식투자는 심리 게임”이라며 “기아사태란 핵심 현안을 풀고 투자자들에게 더이상 기업 연쇄부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는 믿음을 정책당국이 심어줄 수만 있다면 바닥에 이른 주식시장은 회복 세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외국 경제평가기관들은 아 직도 한국경제가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주가도 세계적으로 가장 저평가된 지역의 하나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강혁 기자/ 한겨레 경제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