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졸도한 증시, 정치권이 밉다

대통령선거를 두달여 앞둔 지난 10월8일,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는 총재직 취임이후 처음으로 증권거래소를 방문했다. 통상 선거를 앞두고 여당 대 통령후보가 증권거래소를 방문하는 날은 기대심리로 주가가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날도 이회창 총재는 “증시부양책 가운데 양도차익 비과 세 등 행정조치만으로 가능한 것은 당정협의를 통해 조기에 시행할 수 있 도록 하겠다”고 밝히는 등 주가상승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치와 주식시장의 묘한 함수관계

그러나 주식시장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었다.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610.44 로 전날보다 무려 19.59포인트가 떨어지면서 연중최저치를 나타냈다. 무 엇보다 전날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제기한 ‘DJ비자금설’이 큰 악 재로 작용한 것이다. 증권거래소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정국불안을 야 기한 당사자가 증권거래소 방문으로 주가가 오르기를 기대했다면 시장상 황을 몰라도 한참 모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날 이후 큰 폭의 하락을 계속한 주가는 13일 정부의 증시부양책 발표에도 16일 마침내 600 선까지 무너뜨리면서 현정부 들어 최저치인 579까지 추락했다. 정치에 의 해 농락당하는 주식시장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도대체 정 치와 주식시장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치가 경제흐름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 “선거 전에는 집권당이 경기부양책을 실시하여 실업률을 낮추고, 선거 직후에는 강력한 긴축정책을 실시하기 때문에 선거를 전후해 경기가 일정 한 흐름을 갖고 순환한다”는 이른바 PBC(Political Business Cycle)가설 이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돼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미국의 주식시장은 선거 1년 전부터 주가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해 선거전후에 최정점에 이르 게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80년대 중반까지는 역대선거를 전후해 이 가 설이 대체로 현실과 부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 가설이 그다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증권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역대선거에서 주가는 선거 3∼4개월 전에 대체로 조금 오르는 경향을 보였지만, 이는 선거의 영향이라기보다 는 실물경제의 흐름을 따랐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기가 상승국면이면 주가도 오르고, 하강국면이면 내렸다는 진단이다.

‘여당승리=주가상승’ 성립 안해

아직까지 정권교체는 한번도 없었지만, 총선과 지자체 선거까지 포함해 살펴보면, 경기의 흐름이 선거의 향방에도 결정적인 변수가 되지는 못했 다. 경기가 좋았던 88년 총선에서는 야당이 승리했으며, 경제성장률이 급 락한 92년 대선에서는 반대로 여당이 승리했다. 과열이 우려될 정도로 경 기가 좋았던 95년 지자체 선거에서는 야당이 승리했고, 경기가 나빠지고 있던 96년 총선에서는 여당이 승리했다. 또 여당승리=주가상승, 야당승리 =주가하락이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았다. 92년 14대총선에서 여당이 승 리를 거두자 한때 오르기 시작하던 주가는 얼마 안 가 다시 떨어지기 시 작해 선거 80일 뒤에는 선거일에 비해 오히려 27포인트가 떨어졌다. 95년 지자체선거에서는 야당이 압승을 거뒀지만, 주가는 선거 20일 뒤 최고 93 포인트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예측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국내외 정치적 사건들은 사안의 비중에 따라 주식시장에 크고작은 영향을 끼쳤다. 정치사건들은 특히 주 가의 흐름이 하강국면이었을 경우 주식시장에 주는 충격이 더욱 컸던 것 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기가 마이너스성장을 하고 있던 지난 80년 5·17쿠데타는 5월16일 115 이던 주가를 22일 109로 떨어뜨렸다. 경기회복이 시작되던 83년 버마랭군 사태는 10월7일 116에서 10일 115로 떨어뜨렸지만, 그 영향은 작았다. 호 황기였던 86년에 일어난 건대사태(10월29) 때는 상승세가 계속 지속되기 도 했다. 87년 6·10 민주항쟁은 주가지수를 386(6월9일)에서 378(19일) 로 조금 떨어뜨렸지만, 그뒤로는 주가가 옆걸음질을 치다 6·29선언으로 상승세로 돌아섰다.

하나의 재료가 최대의 주가상승을 가져왔던 사례는 88년 중동전 종식 소 식을 들 수 있다. 경제가 호황국면인 상황에서 날아든 이 낭보는 340(8월 19일)이던 주가를 29일 동안 계속 끌어올려, 종합주가지수 495로 상승폭 이 무려 155포인트에 이르렀다. 반대로 최대의 주가하락을 기록한 것은 9 0년 걸프전 발발 소식이었다. 걸프전은 8월1일 690이던 주가를 25일 587 로 24일 동안 무려 103포인트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경기가 호황국면을 맞고 있고, 주가도 대세상승국면에 있을 때는 악재들도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93년 8월13일의 금융실명제 전 격실시는 상당한 주가하락을 부를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주식시 장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미 항간에 실명제실시 소문이 나돌아 실 명제효과가 공식발표 전에 이미 반영됐다는 점도 있지만, 경기가 지속적 인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는 점도 함께 작용했다. 실명제 발표 뒤 주가는 일시적으로 급락했다가 다시 상승을 거듭해 94년 11월8일 사상최고치인 1 138.73까지 올랐다. 94년 7월8일, 남북정상회담을 무산시킨 김일성 사망 도 일시적으로 주가를 떨어뜨렸지만, 곧 대세상승으로 돌아섰다.

정치권의 의도적 주식값 올리기도

국내 정치사건으로서, 주가를 가장 큰 폭으로 떨어뜨린 것은 노태우 비자 금 사건이다. 95년 10월19일 당시 999이던 주가는 917까지 추락해 무려 8 2포인트가 떨어졌다. 그 여파 또한 11월21일까지 한달 넘게 계속됐다. 당 시 주식시장의 흐름은 그해 1월7일 증시안정책 발표(당시 주가지수 847) 와, 4월1일 가격제한폭 확대(주가지수 934) 이후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 다가 조정국면을 맞은 시점으로, 종합주가지수가 연중최고치(1002)에 거 의 가까운 상태였다.

또 백원구 증권감독원장이 전격구속된 지난해 6월3일 897.22였던 주가지 수는 중간에 회복과 하락을 두번 겪기는 했지만, 10월1일 외국인주식투자 한도확대 발표 때까지 계속 떨어져 789.47에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현 정부 들어 최대의 주가하락을 부른 이 두 사건은 공교롭게도 경기하강국 면에 발생했다는 점과,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계좌추적이 시작된 경우라 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주가지수가 정치를 뒤따라 반영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 우 정치권이 기관투자자들을 동원해 사자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의도적 으로 주가를 올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주가가 사회 불안 혹 은 안정, 경제 발전 혹은 후퇴를 가늠하는 잣대로 비춰지고 있는 점을 고 려해 집권세력이 큰 정치적 행사때마다 주가올리기에 개입해온 것이다.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 전당대회가 열린 지난 9월30일, 열흘 동안 75 포인트나 하락을 계속한 주가지수는 공교롭게도 24포인트가 올라섰다. 그 러나 이같은 일시적인 반등은 결국 일반투자자들에게 짐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최근 주가의 급격한 하락은 일차적으로 기아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분 석이 일반적이다. 기아그룹에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되던 지난 7월15일, 75 5.06이던 주가지수는 10월7일에는 630.03로 떨어져 그동안 하락폭이 무려 125포인트에 이른다. 그러나 증시부양책에도 신한국당의 비자금 정국 조 성 이후 주가가 더 큰폭으로 떨어졌다는 점은 특이하다. 비자금파문 이후 주가지수는 다시 579까지 떨어져 최고 50포인트까지 더 하락했다.

이와 관련해 증권사 관계자들은 “검찰의 계좌추적이 시작될 경우 자금원 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큰손들이 주식시장에서 대거 이탈하는 것은 일반적 인 현상”이라며, “그동안 경제침체에도 대선정국이 안정적으로 이어져 왔는데, 비자금파문으로 정국마저 예측불가능한 상태로 치달으면서 가뜩 이나 추락세이던 주식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다”고 말했다.

정부의 인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우리 경제의 기초여건은 뚜렷한 개선추세를 보이고 있다”며 “최근 주 가는 경제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기 아사태 해결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비자금파문으로 인한 정국불안이 주 가를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이런 복합 적 요인으로 인한 최근의 주식시장 침체는 이제 실물경제 자체를 위협하 는 수준까지 치달아 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