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권리 찾기

시골 노인 울린 초청강연회

(사진/올해로 68세인 아버지와 함께한 이대호씨. 효와 윤리를 앞세워 떠안긴 책이 앞에 놓여 있다.)

"내일모레면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한테 책을 떠넘기다뇨. 그것도 무게가 15Kg 이나 나가는 책을요." 이대호씨는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한가 위를 앞두고 부모님을 찾아뵈었을 때 조용히 말씀을 건네 던 아버지의 조 심스런 말투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가위를 맞아 부모님 집을 찾은 이씨에 눈에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책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다. 무슨 책이냐고 묻는 이씨에게 어머니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며칠 전 집으로 무슨 박사 강연회 초청장이 날아왔다. 평 소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께서 무료함도 달랠 겸 강연회에 갔다는 거였다. 그런데 강연은 하는 둥 마는 둥 조그만 탁상용 시계와 한글학자 의 이름이 선명한 휘호와 함께 책을 주더라는 거였다. 택시까지 불러 타 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보기에도 비싸게 생긴 책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왜 당신에게 주느냐"는 어머니의 핀잔을 듣고서야 이상한 생각이 들 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방구석에 밀어놓으셨다는 거였다.

자초지종을 다시 물었다. 책을 건넨 사람들은 한번도 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다만 강연회에 참석한 증거로 주소와 연락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해서 아버지는 손이 떨려 글쓰기가 어려워 함께 갔던 이웃이 대신 적어주었다는 거였다. 돈 이야기가 있었으면 아무 필요도 없는 더구 나 눈이 어두워 볼 수도 없는 책을 왜 받아왔겠느냐고 아버지는 버럭 화 를 내셨다.

관광을 빌미로 노인들을 이곳저곳 끌고 다니다 별로 소용도 건강식품 등 을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등의 상술을 들어 알고 있는 이씨로서는 답답 한 노릇이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어머니도 함께 강연회에 가서 아버지 대신 주소를 적어주었다는 이웃의 "분명 돈 달라는 이야기는 안할 것" 이 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더이상 아흔을 내다보는 아버지의 심기를 더 이상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책에 적힌 전화번호를 돌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한가위 연휴 중이었다.

한가위가 지나고 며칠 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책값을 내라는 지로용지가 우편으로 도착했다는 거였다. 총액은 30만원이었다. 돈 낼 날 짜가 지났는데 왜 돈을 내지 않느냐는 독촉전화까지 왔다는 거였다. 어머 니의 목소리엔 맥이 쭉 빠져있었다. 시골살림 30만원은 너무나 큰 액수였 다.

이씨는 잠시 고민했다. 부모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씨에게 30만원은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지로용지에 적힌 전화 번호를 돌렸다. 따지고 들었지만 오히려 책을 안 살 거면 반납해야지 왜 반납하지 않았느냐는 타박이 쏟아졌다. 반품 법정기일인 14일이 지났으니 책을 반납 받을 수 없다는 거였다. 왜 책을 팔 때 약관을 보여주지도 않 고 판매하는 책이라는 사실조차 밝히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우리는 수금 을 대행 할 뿐 책을 팔지 않았다"는 답변으로 말문을 막았다. 계속해서 따지는 이씨에게 그들은 법대로 하라며 오히려 큰 소리였다.

이씨는 그들의 말대로 법대로의 길을 찾았다. 고소장을 작성하는 한편 작 은권리찾기의 문도 두드렸다. 그리고 며칠,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반품 을 받겠으니 책을 돌려보내라는 거였다.

이씨는 곧 부모님 집이 있는 경남 남해를 다녀와야 한다. 그러나 책을 반 납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 온 자식을 보는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할까를 생 각하면 치미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다.

"노인들을 끌어들이는 상술이 이런 것을 노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튀어나오는 욕설을 참으며 애써 이씨가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