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북한 농업의 희망을 찾는다

(사진/북한의 협동농장은 생산성을 더이상 높일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농민들이 농업용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북한은 전면적 농업개혁을 시도할 것인가. 그리고 이는 북한 식량난이 나 경제개방과는 어떤 함수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북한 식량난이 내년에도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국내외 학 계가 최근 이런 물음에 답하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단행본·연 구보고서·심포지엄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는 학계의 움직임은 북한 농업과 관련해 잇따르는 국내외 움직임을 해석하는 좋은 지침이 될 것으 로 보인다.

최근 북한의 농업 관련 움직임은 한마디로 ‘식량난 지속에 따른 대안 모 색’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난 9월 말 북한 정무원 농업위원회 최현수 부국장은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와의 회견에서 “농촌에서 11월에 하는 식량 결산분배가 벌써 앞당겨 실시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극심한 가 뭄과 해일 등으로 올해 작황이 나빠진 데 기인하는 것으로, 내년에도 올 해와 같은 식량난이 지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조처다. 10월5일 북한을 방 문하고 돌아온 세계식량계획(WFP) 나만가 은공이 부국장은 내년 식량부족 분을 2백만∼2백50만t으로 추산했다.

주체농법 포기하고 선진 기술 배운다

이런 가운데 9월14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북한농업위원회 고위간부들 이 주체농법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전했다. 또 8월 말과 9월 초 두차 례에 걸쳐 북한 농업관계자가 미국의 선진농업기술을 견학하기 위해 미국 내 농장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북한 농업당국이 뭔가 새로운 변화를 모색 하는 움직임으로 읽힐 수 있는 사안들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연철 박사(정치학)는 최근 연구보고서에 서 “북한 농업은 생산단위를 ‘가족’으로 축소하는 농업개혁이 필요하 다”고 강조한다. 그는 <북한의 배급제 위기와 시장개혁 전망>이라는 연 구보고서에서 “북한은 이미 식량난 대처를 위해 식량공급체계를 지방당 국의 자력갱생에 맡겼다”면서 “그러나 식량난의 근본적 해결은 농업생 산체계의 변화에서 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위해 “현재 시 행하는 ‘분조계약제’의 생산단위를 ‘가족’으로 축소해야 할 것”이라 고 말했다.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올해 초 확대개편된 북한의 분조계약제는 7∼9명을 생산단위로 한 뒤 목표치 이상의 생산물을 분조원 들의 자유처분에 맡기는 제도다. 김 연구원은 중국 농업개혁의 초기형태 에 해당하는 이 제도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경제적 인센티브가 적은 편이라고 분석한다. 중국은 이후 협동농장을 해체하고 가족농체제로 환원해 농업부문에서 비약적인 생산성 증대를 경험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10월13일 ‘김정일 총비서 시대의 북한경제정책’ 이라는 특별보고서에서 “북한이 분조계약제를 본격 시행하고 이를 가족 도급제 또는 개인농제도로까지 발전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KD I는 농업개혁 가능성을 높게 보는 근거로 김정일 비서의 총비서 공식승계 를 꼽는다. “김정일 총비서가 그동안의 ‘유훈통치’에서 벗어남으로써 김일성 주석과 다른 정책을 취하는 것이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대학교 김성훈 부총장은 최근 <북한의 농업>이라는 저서에서 “북한 농업개혁을 위해서는 남북 농업협력이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밝 혔다. 그는 “북한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면적 개혁보다는 품목별·지역별 단계적 개혁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전제한 뒤, “비무장 지대 부근 평야나 평양 근교에 시범농업단지를 조성하자”고 북한쪽에 제 안한다. 이를 남북 농업교류협력을 위한 개방지역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 다. 그는 이런 남북농업교류정책이 통일 뒤 남북 농업통합을 좀더 앞당기 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는 또 이런 조처가 북한은 물론 남한에 도 득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남쪽의 쌀과 북쪽의 밭작물 등 상 호보완적 공급체계를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북한 농업 재건을 위해서는 좀더 큰 틀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들 도 잇따르고 있다. 남한 혼자 감당하기에는 북한 농업 재건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10월1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운근 박사는 연구보고서를 통해 북한 농업 재건에는 총 24조7천억원 가량의 자금이 필 요하다고 분석했다. 이 자금은 식량지원과 농기계지원 등 단기적인 대북 지원 8조7백71억원, 간석지개발·연료대책·과수 및 뽕밭개발 등 중장기 지원 16조6천1백34억원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비해 중국 연변대학교 동북아경제연구소 최용학 소장은 북한 농업문 제 등을 고민할 ‘동북아 농업협력회의’ 구성을 제안한다. 그는 10월22 일 단국대 협동문화경제연구소(소장 장원석 교수) 주체의 ‘21세기 통일 ·국제화·환경농정에 관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동북아 지역의 식량자급 을 위해 이 지역의 ‘농업 국제분업’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 의 광대한 토지와 남한·일본의 농업기술이 합쳐지면 이 지역 식량자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국제분업이 궁극적으로는 북한 의 농업개혁 등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지적이다.

국제기구 가입도 활로… ‘낚시법’ 전수해야

이와 함께 북한 농업개혁을 위해 북한을 국제기구에 적극 가입시켜야 한 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북한농업연구회가 10월18일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정세훈 배제대학교 객원교수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아시아개발은행( ADB)을 통한 자금조달이 북한 농업개혁의 관건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현재로서는 이들 기구가 싼 이자로 공급하는 자금만이 북한 농업개혁에 가장 안정적인 ‘자금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현재 북 한이 IMF나 ADB 가입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만큼, 이들 단체에 대 한 북한 가입이 성사될 수 있도록 남한이 적극 힘을 보태야 할 것”이라 고 주장했다.

최근 학계에서 이렇게 북한 농업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북한의 농업개혁이 전체 경제개혁을 촉발시킬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판 단에서다. 중국의 경우도 협동농장의 해체에 따른 농업생산성 향상이 경 제개방이 밑거름이 됐고, 남한의 경우도 농업은 싼 농산물 제공과 노동력 의 도시 유입으로 산업화의 밑거름으로 기여했다. 학자들의 문제제기는 또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할 시점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