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낙태 공포, 이제는 그만?

(사진/여성들의 원치 않는 임신은 낙태로 이어져 사회적인 문제를 만든다. 낙태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 <더 월>의 한 장면.)

낙태는 ‘살인행위’인가, 단순한 ‘수술’일 뿐인가.

대부분의 기혼부부는 피임을 한다. 불임시술, 콘돔, 자궁내 장치, 구강피 임약 등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피임방법은 아직까지 인류의 희망사항에 가깝다. 피임을 게을리 하다보면 원치 않는 임신에 이르게 마 련이다. 음란한 성문화의 영향으로 피임에 대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성 경험을 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성폭행에 의해 임신을 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데미 무어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더 월>(If the walls could talk:더 월 은 여성의 자궁벽을 상징)은 원치 않는 임신에서 비롯된 낙태문제를 사실 적으로 다루었다. 남편을 여읜 지 6개월된 미망인이 아이를 가져 가족의 따돌림 속에 낙태를 하고, 뒤늦게 대학에 들어간 여성은 임신 사실을 알 고 학업을 포기한다. 여대생이 유부남 교수의 아이를 가져 고통을 겪기도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은 여성에게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주고 주변의 뜨악 한 시선으로 삶을 망가뜨리기 일쑤다. 정상적인 피임을 하지 못한 상황에 서 여성들이 임신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약품설명서에 사후 피임 효과 밝혀라”

전세계 의학계는 낙태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피임법 연구에 몰두하고 있 다. ‘응급피임법’은 그 가운데 하나지만 국내에는 널리 소개되지 않았 다. 최근 미국 의학계의 대변지인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NEJM) 은 ‘응급 피임법’(Emergency contraception)의 활성화를 위해 약품설명 서에 그 효능을 밝혀야 한다는 사설을 실어 주목을 끌었다. 그 내용은 “ 20여년 전에 효능이 입증된 피임법을 제약회사들이 사용설명서에 명시하 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 식품의약국(FDA)도 응급피임약의 효과와 안정성 을 인정하고 있다”며 여성을 원치않는 임신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의 주장대로 구강 피임약의 약품 설명서에 “이 약을 의사의 처방대로 복용하면 원치 않는 임신을 막을 수 있다”는 안내문이 있다면 일대사건이 될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인공유 산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해소할 수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낙태반대론자들의 반발이 골칫거리다. 그들은 ‘응급피임법’도 생명체를 살해하는 낙태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전 과정을 생명의 탄생 과정 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태아에 대한 ‘살인행 위’라는 얘기다. 어떤 경우에서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 에서 출발한 주장이다. 이에 비해 낙태옹호론자들은 ‘응급피임법’이 태 아의 인권시비를 없애고 여성들을 임신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며 대중 화를 촉구하고 있다.

‘응급피임법’은 성교후 아침에 먹는다고 해서 ‘모닝 애프터 필’(Morn ing after pill)이라 불리기도 하는 구강피임약 사용을 일컫는 말이다. 이 방법은 보통 피임약의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두가지 여성 호르몬 의 용량을 높여 복용해 임신을 막는다. 복용시기에 따라 배란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배란을 지연·방지하고 배란 이후라면 착상을 방해한다. 일반적 으로 성관계 뒤 72시간 이내에 구강피임약 2∼4알을 복용하고 다시 12시 간 안에 같은 양을 복용하거나, 2알씩 4, 5일 정도 복용하면 80% 가량이 피임에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임상실험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응급피임법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과다한 복용으로 구토 증세가 나타나거나 피임에 실패하면 난관의 운동성을 떨어뜨리는 호르몬제의 본 래 기능 때문에 자궁외 임신을 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인공유 산제로 사용하는 ‘RU 486’보다 인체에 미치는 부작용이 크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미국 의학계는 ‘응급피임법’이 특별한 피임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가운데 성관계를 가진 여성에게 유용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다. 지 난해 미국 식품의약국도 시판되는 응급피임약을 분석해 합격판정을 내리 고 약에 대한 처방지침서를 배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약회사들은 법률 ·종교적 분쟁을 우려해 시판하는 약품의 설명서에 응급피임 효과를 밝히 지 않고 있다. 의사들도 응급피임약의 정확한 처방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 일반 여성들이 응급피임법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낙태는 사회적인 문제다. 보건사회연구원의 통계에 따르 면 기혼여성의 2명 가운데 1명이 한번 이상의 낙태를 경험해 출산보다 두 배나 많은 낙태시술이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아이 골라낳기 열 풍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임신 3개월 전후의 인공유산이 대다수를 차 지한다.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낙태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사 회단체를 중심으로 ‘응급피임법’ 대중화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대한가족계획협회의 한 관계자는 “성문란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응급피임약 오·남용은 또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먼저 우리 실정에 맞는지 충분히 검토를 하는 가운데 저소득층의 기혼여성과 성폭력을 당한 여성, 법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여성 등을 대상으로 협회 차원에서 투약할 방법을 찾고 있다”며 시범사업 실시계획을 내비쳤다. 대한가족계획협회는 응급피임약으로 국내에서 보건복지부의 허가받은 약 품이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 약품을 수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쉐링 마 케팅부 차마리씨는 현재로선 ‘응급피임약’이라고 표기한 피임약의 국내 시판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국내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청소년들의 오 ·남용을 우려하기 때문에 ‘응급피임약’에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현 재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구강피임약도 전문의와 상담하면 처방 에 따라 응급피임을 할 수 있다. 건강한 여성이라면 처방에 따라 하루에 2∼4알을 복용하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문의가 처방하면 일반 피임약도 가능

국내 의료계도 응급피임법의 효능을 인정하고 있다. 울산대 의대 서울중 앙병원 산부인과 강병문 교수는 “무엇보다도 규칙적으로 피임약 등을 사 용해 임신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만 현재 시판되는 구강 피임 약으로도 원치 않는 임신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다음 생리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그같은 부작용은 미미한 수준이다. 아직까지 응급피임을 위해 병원을 찾아오는 여성을 만나지 못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 지 않아 공개적인 교육은 어렵겠지만 의사와 상담하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임신을 원치 않는 여성이 낙태를 막는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임신은 더이상 풍요의 상징이 아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갈수록 증가 하면서 피임은 일상생활로 자리잡고 있다. ‘응급 피임법’은 말 그대로 ‘비상수단’일 뿐이다. 출산을 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낙태를 피 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인 것이다. 게다가 인공피임법이 100%의 피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쨌든 생명의 탄생을 고통 으로 여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