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인간의 얼굴을 가진 정보사회

이미 대통령선거 열풍에 휩싸여 매스컴이 후보간의 공방전을 연일 톱뉴스 로 전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0월15일에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제 3차 정보화추진확대보고회의가 열렸다는 소식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보도된 바 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정보사회 구축을 위한 정부차원 의 종합적인 청사진이 전자상거래, 정보고속도로 구축, 정보산업 육성, 국가행정정보화 등과 관련하여 제시되었다고 한다. 이번 선거가 21세기 정보사회를 여는 대통령을 뽑는 의미를 담고 있고 따라서 각 후보마다 강 력하고 화려한 정보화 추진정책을 대선공약으로 내세우고는 있으나, 정작 현정부의 이번 정책 제시에 후보로서 어떤 언급도 없음은 아쉬운 일이라 고 생각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90년대 들어 세계 각국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세 계화의 진전이라고 하는 국제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대응해 저마다 미래지 향적 정보사회의 구축을 국가전략으로 표방하고 나섰다. 좀더 최근에는 이를 위한 세계적 차원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미국이 세계정보기반(Global Information Infrastructure)을, 유럽연합이 세계정보사회 (Global Infor mation Society)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드디어 1995년 2월 정보사회에 관한 G-7 장관회의에서 세계정보사회를 위한 기본원칙의 합의 로 결실을 맺었다. 이 기본원칙에는 경쟁의 촉진, 민간투자의 장려, 신축 적인 규제틀, 네트워크에의 개방적 접근, 보편적 서비스 보장, 시민에 대 한 기회평등 촉진 등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화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있고 , 초고속정보통신망을 2010년까지 31조7천억원을 들여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보화정책은 산업육성과 국제 경쟁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인간보다 기술을, 시민사회보다 시장 을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사실은 대부분의 선진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로 보인다. 세계화라는 경제우선적 가치와 정보사회론 같은 기술결정적 담론이 현재 전세계에서 정보사회에 관한 논의와 정책을 휩쓸고 있는 것 이다.

그런데 공동체적 민주주의 전통을 자랑하는 덴마크에서는 시장이나 기술 보다 시민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독특한 덴마크식 정보사회모델을 정부 차 원에서 추진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1995년 ‘정보사회 2000’이라 는 정책계획서를 통해 덴마크는 2천년대에 열어갈 정보복지사회의 청사진 을 제시한 바 있으며, 매년 이 계획서에 따라 정책실행계획을 연구정보기 술부에서 작성하여 의회 비준을 거쳐 시행하고 있다. 이 부처의 장관인 힐덴(Jytte Hilden)이 지난 5월에 의회에서 발표한 정보기술정책백서인 < 권위의 몰락>(Authorities Heading for a Fall)에서는 정보사회에서 시민 의 권리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정보기술은 아무에게나 강요되어서는 안 되지만, 원하는 모 든 시민이 쉽게 접근 가능하도록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사회의 모든 집 단에는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교육시스템에서 정보기술의 이용은 개별 학생의 필요와 자질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 다. 전자통신의 요금은 어떤 특정 집단이나 지역도 이용할 수 있는 수준 이 되어야 한다. 정보기술은 가능한 최대 한도로 보편성의 원칙에 따라 설계되어서, 예컨대 노령집단이나 장애인 특수집단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정보기술의 언어는 국어여야 한다. 인터넷에서의 상거 래는 소비자 기본권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프라이버시와 개인적 가 치의 보호가 정보망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문제는 단지 어떻게 정보사회에 선착하느냐보다 그것을 올바로 성취하는 일이라고 위 정책백서의 결론에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는 기 술 자체에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성, 기회의 만인평등, 공 동결정과 같은 가치를 반영 및 발전시키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만 찾아 진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정보사회 추진도 시민을 소외시키는 살벌한 경쟁논리가 아니라, 이제는 따뜻한 인간미가 흐르고 사회적 약자를 감싸 안는 새로운 정책기조가 바탕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번 대선의 후보 들에게서도 듣기 사나운 상호비방보다 이러한 신선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아직 나는 고대하고 있다.

(*언급된 자료들의 전문을 구하고 싶으신 분은 인터넷 http://www .fsk.dk/fsk/publ로 찾아가시기 바람.).

김환석/ 국민대 교수·사회학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