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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사전

“오늘 우리의 현실은 편리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관념 때문에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한계에 부닥쳤다. 최근엔 문학도 창작적인 생산이 멈추고 말았다. 소설은 창작이 아닌 복제품만 난무하고 시도 삶의 본질과 는 거리가 먼 취미생활이 되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대표문학선집으로 지정한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의 문학현실에 대한 일침이다. 창작의 고통이 스며있지 않은 작품에 현실과 교감할 수 있는 문학적 감성 이 담겨있을 리 없다. 게다가 우리 말과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1969년에 연재를 시작해 무려 26년 만인 지난 94년에 전16권으로 완간한 <토지>는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봉우리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자리잡 고 있다. 인간 역사의 총체적인 면모가 드러난 소설로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그래서 ‘<토지>읽기’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으며 <토지>의 세계관과 그것의 독특한 구조를 다룬 여러 권의 평론서가 나오기도 했다.

최근에 나온 <토지사전>(임우기 정호웅 엮음, 솔 펴냄)은 총체성을 밝히 는 평론에서 다룰 수 없었던 문학적·언어학적 성취에 대해 세부적으로 접근한 국내 최초의 단일 문학작품에 대한 사전이다. 문학평론가 임우기 씨와 함께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국문학 전공가 등 11명이 4년에 이르 는 자료조사와 집필 끝에 8백여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묶었다. 경상도 남 부 지방의 사투리를 비롯한 방언·속담 등의 관용구, 풍속어가 풍부하게 담겨있고 등장인물·제도·사건 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토지사전>에는 2천5백15개의 어휘와 방언이 예문과 함께 총망라되어 실 렸다. 러시아 사람을 얕잡아 부르던 ‘마우제’를 찾으면 “그러나저러나 연해주에 가서 마우제들 고깃배나 타볼까?”(4:119:8)라는 예문이 나오는 식이다. ‘드난꾼’이 무슨 말인지 어림짐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만 <토지사전>을 통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임시로 남의 집 행랑에 붙어 살면서 그 집 일을 도와주는 고공살이를 사는 사람’이라는 풀이가 나와 있는 것이다. 4백38개의 속담풀이도 <토지>의 문화적·사회적 배경에 대 한 이해를 돕고 1백79개의 풍속 및 제도는 당대의 유행과 풍습을 떠올리 도록 한다. <토지사전>은 소설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 1백4명의 일대기 를 담은 인명사전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마저 우리말이 소외당하는 상황에서 <토지사전>은 글쓰는 사람들 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라 하겠다. <토지>가 그만큼 작가정신에 충실한 글쓰기를 보여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이버 소설, 신변잡기 소설도 나름 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들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의 쓰임새를 폭넓게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닐까.

김수병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