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컴퓨터로 열어제낀 빛의 세계

“높고 푸른 가을하늘, 오늘 날씨 정말 좋지요.” 시각장애인 김병호(32) 씨는 하늘을 보지 않고도 날씨를 쉽게 안다. 매일 아침 컴퓨터 통신망에 들어가 주요 뉴스며 날씨 메뉴를 뒤지는 것으로 하루일을 시작하기 때문 이다. 하루라도 신문이나 컴퓨터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을 듣지 않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의 직장은 용인에 있는 삼성맹인안내견학교 부설 시각장애인 무료 컴퓨 터교실이다. 여기서 김씨는 음성과 문자인식기술을 합성한 시각장애인 전 용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시각장애인들에게 기본적인 컴퓨터 지식과 도스,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통신 등을 가르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책이 나와 있기는 하지만 소수 단행본과 한두 종류의 잡지에 불과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정보를 점자책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도 원하는 정보를 원 하는 시간에 찾아볼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김씨가 컴퓨터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도 실명 이후 겪었던 세상 과의 고립감, 정보로부터의 소외감 때문이었다. 그는 실명 전에는 새로운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젊은이였다. 83년 구미전자공고 졸업반 때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무선사업부에 입사한 그는 주경야독으로 89년 금호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창 일하던 지난 93년 갑자기 두눈이 충혈 되며 심하게 아프기 시작하더니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포도막염’.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희귀병으로 실명의 날만 기다려야 했다. 치료 를 위해 직장을 휴직한 그는 구미와 서울을 오가며 1년6개월 동안의 눈물 겨운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94년 12월 태어난 둘째아이의 얼굴을 희미하게 본 것을 마지막으로 95년 12월 완전 실명판정을 받았다.

항상 호기심과 지적갈증에 목말라하던 그에게 깜깜한 세상은 너무나 답답 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 이외에 도 책이며 신문 등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안마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좀더 성취감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실명하기 전 컴퓨터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는데 어 쩔 수 없이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 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씨는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실력을 쌓았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때마 침 맹인안내견 학교에서 안내견 ‘구슬이’를 분양받게 됐다. 컴퓨터의 유용성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된 김씨는 투병생활 동안 가졌던 막연한 계 획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학교쪽에 시각장애인을 위 한 컴퓨터교실 마련을 적극 제안했다. 그리고 지난 4월 삼성전자에서 안 내견학교 컴퓨터 강사로 아예 자리를 옮겼다. 김씨는 앞으로 컴퓨터 강사 의 길을 걸으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학습, 업무, 오락 등 프로그램 개발 을 통해 동료 장애인들에게 ‘어둠 속 빛’을 보여주고 싶다는 꿈에 부풀 어 있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