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맛기행

눈부신 황금빛, 지리산 국화주

늦가을 시골 들녘을 지나다보면 어디서나 노란 들국화가 활짝 핀 모습을 볼 수 있다. 양지 바른 곳에 핀 것은 차갑도록 맑은 햇살에 그 샛노란 자 태가 눈이 부실 지경이고, 꽃내음이 어찌나 강한지 꿀벌들마저 추위를 아 랑곳하지 않은 채 극성스럽게 매달려 있다. 여름내 덤불숲에 가려 줄기조 차 가려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잊혀졌던 것이, 된서리가 내려 풀숲이 오간 데 없이 텅 빈 자리에 혼자 여유작작 가을 햇살을 즐기며 잠자던 벌 들까지 불러모으는 오기가 실로 신비롭다.

우리 옛 어른들이 이 기이한 꽃을 한낱 풀꽃으로 무심히 보아넘겼을 리 없다. 여인들은 곱게 자란 꽃가지를 꺾어 다듬잇돌 밑에 꼭꼭 눌러 말려 두었다가 문창호지를 바를 때 문고리 주변을 예쁘게 장식했다. 문을 여닫 을 때마다 햇볕에 노란 국화송이가 비치는 모습을 음미하며 겨울의 지루 함을 달랬다. 뿐만 아니라 꽃송이를 곱게 말려 베개 속에 한줌씩 넣어 은 은한 향이 배어나게 했고, 그 향은 가족들의 잠자리는 물론 건강까지 지 켜줬다.

들국화에 대한 애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잎새로는 화전을 부치고 꽃잎 은 차에 띄워 마셨다. 술을 빚어 그 향에 취하기도 했다. 어떤 꽃이 참 들국화인지조차 모르고 무심히 지나치는 요즘의 우리 모습과는 대조를 이 룰 정도로 국화를 좋아했던 것이다.

경남 함양에 가면 들국화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은 어디서 근거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진시왕이 약초를 구하러 조 선에 사람을 보냈는데, 그 약초가 바로 지리산 황국이었다고 천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무튼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할 만큼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 다보이는 산밭들 주변은 샛노란 들국화가 경상도 말대로 억수로 핀다. 꽃 송이도 유난히 실하고 향도 한약냄새처럼 진하다. 한송이 따 차 안에 넣 어놓으면 하루 종일 국화향으로 가득 찬다.

함양지방에서는 이처럼 질이 뛰어난 국화로 술을 담아 고장의 명주로 명 맥을 이어왔다고 한다. 바로 지리산 국화주다. 그것이 일제와 6·25전쟁, 5·16군사쿠데타 이후 식량정책 등으로 오랫동안 그 맥이 끊어졌다는 것 이다. 그러나 몇해 전 함양읍 삼산리 김광수(34)씨가 부친 김종봉(77)씨 의 조언과 동의보감 등 문헌에서 찾아낸 주방(酒方)에 따라 옛 지리산 국 화주를 재현해냈다.

지리산 국화주는 천왕봉과 칠선계곡 등지로 이어지는 휴천면 일대 10여 농가에서 계약채취한 국화와 함양지방의 찹쌀로 밑술을 빚는다. 꽃송이에 서 한뼘쯤 내려가 줄기와 잎을 함께 끊어내 선선한 곳에 말려놓고 1년내 술을 빚는데, 국화만도 한해에 2천∼3천kg이 들어간다고 한다. 숙성된 술 은 역시 황금빛이고 입에 붙는 감미로움과 고상한 국화향이 배어나 술맛 에 취하고 향에 취한다는 옛말을 실감케 한다. 16도 안팎의 순한 술은 반 주로도 적격이다.

국화는 정혈작용이 뛰어나 고혈압에도 좋고, 반주로 꾸준히 마시면 몸이 가벼워지고, 오장을 고르게 하고, 골수를 보강해 뼈를 튼튼하게 한다고 한다. 귀와 눈을 밝게 한다는 얘기도 있다. 국화주는 중국에서도 명주로 꼽혀 ‘팽조’라는 인물은 국화주를 먹으며 8백살을 살았다는 전설이 전 해온다.

이 가을 야외로 나갈 기회가 있으면 잘 핀 국화를 몇송이 따다 말려놓자. 차에 우려먹거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과일주나 소주에 미리 띄웠다가 내 면 주연상이 국화향만큼이나 격상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고결한 성품 간직한 진노랑 들국화

가을 들녘을 황금빛으로 수놓는 들국화는 가을꽃의 대명사처럼 친숙한 꽃 이다. 하지만 너무 친숙한 나머지 웬만한 들꽃은 모조리 들국화라고 하는 데, 그건 잘못된 일이다. 보라빛으로 피는 꽃은 쑥부쟁이꽃이거나 취나물 꽃이고, 흰빛에 노란 꽃술이 박혀 있는 것은 구절초이다.

들국화는 꽃잎과 꽃술이 모두 진노랑빛이어서 한낮에 보면 샛노랗다. 꽃 송이도 작아 경상도에서는 ‘단추국화’라고도 한다. 이것을 참국(眞菊) 또는 황국(黃菊)이라 하고, 감국(甘菊)이라고도 한다. 순수한 야생화이지 만 성품이 고결하고 향과 약효가 뛰어나 영초(靈草) 또는 선초(仙草)로 여긴다.

지리산 국화주는 함양읍 삼산리 25(0597-62-7755)에 주문하면 우편으로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