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신한국당 마지막 결투

(사진/지난 10월20일 열린 신한국당 새 당사 입주식. 자리에 함께 한 당내 주류쪽 중진들에게서도 `후보교체론'이 나오는 등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지고 있다.)

신한국당이 또 시끄럽다. 이회창 총재의 지지율이 비자금 사건 이후에도 오르지 않자 “이회창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에서부 터 “후보 교체를 해야 한다”는 적극 반대론까지 각종 ‘이회창 떨어뜨 리기’가 또다시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당내 세력간 마지막 결투 임박

서청원 의원 등 비주류 민주계의 모임이 잦아지고 있으며, 김수한 국회의 장과 김명윤 의원 등 당 원로들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이들은 “10월 말 까지는 이 후보의 지지율 변화를 지켜보겠지만, 그 이후의 행동은 우리 자신이 더이상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서석재 의 원과 김운환 의원 등 탈당파들은 아예 “우리의 행동은 민주계 등 신한국 당원들에게 이회창 후보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경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회창 흔들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7월

21일 후보 선출 전당대회 이후 여권이 한 유일한 대선 준비는 ‘이회창 떨어뜨리기’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여권의 지난 3개월 은 대선후보를 둘러싼 분열과 갈등의 시간이었다. 이 후보의 아들 병역문 제로 불거진 후보 교체론은 8월에는 공론화를 위해 8월 말까지, 9월에는 9월 말까지, 다시 10월 말까지로 시한만 연장돼왔을 뿐 한시도 사라진 적 이 없었다. 날씨만 우중충해지면 나타나는 신경통처럼 이 후보가 정치적 으로 어려워지면 고개를 내미는 게 여권 내 후보 교체론이었다. “경선 이후 당이 일치 단결해 선거운동을 해본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느냐”는 이 후보쪽의 항변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의 교체론 내지 회의론은 이전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우선 1 2월18일 선거일이 불과 5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시간적 절박성이 이제 는 더이상의 탐색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후보를 안고 가느냐 아니 면 버리느냐, 또는 따라 가느냐 홀로 떠나느냐에 대해 가부간 결단을 내 려야 하는 시점이다. 이는 후보 교체론이 공론화되고 제기될 경우 이전처 럼 결정 시기를 연장하거나 대충 얼버무려도 되는 절충이란 게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후보 교체론은 이제 당내 세력간 마지막 대결 로 이어질 수 있는 폭발성을 안고 있다.

적과 아군이 쉽게 구분이 안된다는 점도 현재 당내에 떠도는 후보 교체론 의 주요 특징이다. 이전에는 민주계 비주류만 후보 교체론을 줄곧 떠들었 을 뿐 대부분은 이 후보 지지 또는 분명한 중립지대에 있었다. 그래서 피 아 구분이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중립지대에 있는 세력마저 비주류의 후 보 교체 구호에 흔들리고 있다. 김명윤 고문 등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 던 민주계 원로들이 이 후보의 ‘결단’을 촉구할 시기를 엿보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서청원 의원은 이와 관련해 “내가 나서지 않아도 후 보 교체나 이 후보의 퇴진을 요구할 사람들이 많더라”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이 후보쪽에 서있는 세력 즉, 당 대표와 공동선대위원장 등도 은근히 이 후보의 낙마를 기대하고 있다 는 이야기다. 이한동 대표와 김덕룡 박찬종 공동선대위원장 등 이 후보를 떠받쳐야 하는 선거의 중심 기둥들이 선거운동에 매진하기보다는 이 후보 낙마 이후의 대안을 꿈꾸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비자금 정국 청와대 심기 건드려

이 후보가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면서 “92년 여권 의 대선자금에 대해서도 증거가 나오면 수사해야 한다”며 ‘법 앞의 평 등론’을 제기한 것도 문제였다. 이 대표는 “김 대통령은 정치자금을 개 인적으로 관리하거나 보관한 적이 없는 만큼 김대중 총재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우회적으로 반박했다. 김덕룡 공동선대위원장도 “이 총 재의 비자금 정국 핸들링(관리)에 문제가 있다”면서 “이 총재가 다른 당 후보와 차별화해야지 김 대통령과 차별화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본선에 나가야 하는 자기 당 후보를 보호하고 올려세우기는커녕 당 중진들이 자기 목소리 내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이 다. 이들 주변에서 “10월 말까지도 이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으면 다른 특단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얘기들이 슬슬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이들이 ‘두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사진/한국일보 주최 토론회에서 비자금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이회창 후보. 김대중 후보뿐만 아니라 청와대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 )

이와 함께 청와대의 기류, 정확히 말해 이 후보와 김 대통령의 관계가 투 명하지 못하다는 것도 여권의 최근 분위기와 관련해 주요한 특징을 이루 고 있다. 청와대가 이 총재의 ‘법 앞의 평등론’에 발끈하면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등 이 총재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조홍래 청와대 정무수석은 18일 기자들과 만나 “차별화란 5, 6공 용어이지 문민정부에 서는 적절치 못한 용어”라고 정면에서 반박했다. 조 수석은 “정치개혁 을 추진해온 김 대통령과 차별화를 하겠다면 수구 보수로 회귀하자는 얘 기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총재쪽이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은 원론적인 얘기일 뿐 김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진행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지만, 조 수석은 평소 익 명으로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던 관행과 달리 이날은 자신의 이름을 밝혀 도 좋다며 이 총재쪽을 직접 겨냥했다. 이 총재에 대한 김 대통령의 불편 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김 대통령이 이 총재쪽의 회동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나 청와대의 실무 비서관들이 이 총재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것 등도 청와대의 최근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

여권이 총체적으로 분열되고 갈라지고 있는 증거들이다.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중립적인 서울출신의 한 초선 의원 은 “이 후보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 여부를 떠나 우리가 뽑았으면 허물은 덮고 장점을 살려서 최선을 다해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니냐 ”면서 “걸핏하면 내부에서 딴죽이나 거는 풍토에 선거를 치를 맛이 도 무지 안 난다”고 말했다. 민주계의 한 초선 의원은 “청와대가 당의 후 보를 흠집내기 위해 안달인 것 같다”면서 “이제 곧 물러나야 할 김 대 통령이 ‘득표를 위해 필요하다면 나를 밟고 가라’는 정치적 아량을 보 이기는커녕 ‘차별화를 시도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노발대발하는 등 정말 한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권은 이제 기로에 섰다. 그동안 이 후보의 지지율 상승에 한가닥 기대 를 걸었지만, DJ비자금설 파동에서 나타났듯 이 후보의 저조한 지지율은 백약이 무효인 것으로 보인다. 후보 연대 등 다른 변화가 없는 한 이 후 보의 경쟁력 회복은 쉽지 않다는데 대부분 동의한다. 지더라도 공식후보 를 안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민주주의의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후 보 밀어내기 즉, 내부 쿠데타를 감행하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이회창 “죽어도 안 나간다”

이 후보는 물론 여당후보로서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밀어내기에는 절대로 굴하지 않겠다 는 것이다. 이 후보의 한 측근은 “이 후보는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갖 고 있다”면서 “설령 질 것이 분명하더라도 후보 양보는 절대로 없다” 고 말했다. 다른 측근은 “한국 선거의 풍토와 정치 문화를 바꾸는 전기 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당내의 흔 들기에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계 비주류는 이 후보를 지지하는 주류쪽의 ‘배반’을 기대하고 있다 . 민주계 한 중진 의원은 “이 대표를 지지하는 주류 특히 김윤환 공동선 대위원장이 우리 입장을 지지하면 후보 교체 문제 풀기는 쉬워진다”면서 “허주(김 선대위원장의 아호)도 지난번에 10월 말까지 이 후보의 지지율 이 오르지 않으면 대책을 마련하자고 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주는 현재 이 후보 교체론에 반대하고 있다. “후보 교체는 현 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더러 지지율이 낮다고 후보를 바꾸자는 것은 민주주 의의 룰을 깨는 지극히 잘못된 일”이라는 분명한 입장이다. 이 후보를 끝까지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야당도 각오해야 한다는 의사표시 로 읽힌다.

허주의 태도가 비교적 명확해짐에 따라 비주류 등 후보 교체론자들의 태 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결국 야당에는 정권을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 는 이유를 내세워 후보 교체를 주장하는 비주류가 선택할 길은 결국 야당 될 각오를 하고 이 후보 등 주류를 따르든지 아니면 분당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인 셈이다. 그 시기도 10여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